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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없는 세상
동정 너머의 세상, 그 씁쓸함에 대하여
올해 문학동네 신인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 「동정 없는 세상」은 수능을 막 끝낸 열 아홉살 미소년 준호가 동정 딱지를 떼기까지의 헤프닝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준호는 동정 딱지를 떼는 것으로 진짜 남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공부 잘 하고 재미없는 책과 영화를 즐기는 여자친구 서영은 ´한번 하자´는 준호의 제안에 ´싫어!´로 일관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서영을 설득해서 한번 하고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그 일-딱지를 떼고 동정 없는 세상으로 편입하는 일-에만 몰입해 있는 준호는 이렇게 기도한다.
˝수능? 대학? 다 필요없다. 내 소원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햇님햇님. 제발 올해가 가기 전에 서영이와 한번 할 수 있게 해주소서. 두 번을 바라는 것도 아니걸랑요. 딱 한 번만이라도요.˝ (p.103)

하지만 준호가 그토록 원하는 동정 없는 세상, 어른들의 세상도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님을 작가는 소설 곳곳에서 보여준다. 대한민국 최고 명문 법대를 졸업했으나 누이에게 얹혀사는 룸펜 삼촌 명호씨의 삶(결국 만화가게 사장이 되긴 하지만), 이름이 거창해서 헤어디자인 연구소지 사실 미용실에서 종일 TV드라마만 끌어안고 있는 엄마 숙경씨의 삶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마침내 서영과 ´한번´하기를 달성한 후 이어지는 준호의 독백을 보라.

“아무것도 없었다. 끓어오르는 열정과 쾌락과 신음과 교성과 열락과 기쁨은 모두 포르노 안의 것이었다. 내 몫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적막과 씁쓸함과 외로움과 허전함이었다... 고작해야 이정도인 것이었구나. 이따위에 불과했구나.”(p.171)

우여곡절 끝에 서영의 ´라비린토스(미궁)´ 를 찾아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기쁨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기를 기대했던 준호가 찾은 것은 오히려 전에는 느껴보지도 못했던 씁쓸함과 허탈감 뿐. 그리고 준호는 반문한다. ‘내가 어른이라고? 불과 몇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른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어른이라고?’

이쯤에서 우리는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려 했던 바를 짐작할 수 있다. 동정을 떼는 것이 곧 남자로, 어른으로 거듭나는 지름길이라는 사춘기시절의 믿음이란 영 허황되고 부질없는 욕망이라는 것, 동정을 간직한 세상과 동정을 떼어버린 세상은 불과 ´한끗차이´일 뿐이라는 것, 오히려 준호가 그토록 갈망하는 어른의 세상은 곧 동정(同情)없는 세상에 불과하다는 것. 작가는 이러한 세상살이의 이치를 우리 청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을 도구로 술술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신경을 곤두세워 읽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작가의 의도는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 단순한 이야기 구조, 경박한 화법에 파묻혀 자칫 사장되기 십상이다. ´야하면서도 건전하고 불순하면서도 순수한 젊은 호흡이 느껴지는 건 좋은데 지나치게 가벼운 소설´이라는 박완서 선생의 심사평도 바로 이러한 가벼움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소설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은 모름지기 재미있어야 한다는 미덕 말이다. (이현희 imago@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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