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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  | |
| 나는 혹시 내 인생의 입양아가 아닐까
앤 타일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드는 생각은 이 작가는 정말 일상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구나, 라는 것이다. 많은 순간, 일상은 물처럼 태연하게 흘러간다. 어쩌다 한 번 요란스런 기복을 보일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상의 한 켠에서 벌어지는 작은 소동일 뿐. 드라마틱한 사건들은 언제나 허구 속에서나 진행되고, 일상을 이루는 것들은 대체로 평범하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일상은 허구의 세계보다 재미있다. 그건 일상 속의 이야기가 주는 잔잔한 기쁨과 감동 때문일 것이다.
앤 타일러의 새 소설 「인생」(원제: 오래 전 우리가 어른이었을 때)은 쉰 셋의 할머니 레베카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첫 사랑을 버리고 딸 셋 딸린 이혼남과 부랴부랴 결혼, 결혼 7년만에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살아가게 된 레베카. 그녀의 곁에는 이제 남편이 남긴 딸들과 100세 생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숙부 파피, 그리고 그녀가 살고 있는 19세기 양식의 덩그란 집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쉬임 없이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며 가족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레베카의 딸들이 오늘날 젊은 미국인들의 변화무쌍한 라이프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남편이 남긴 낡은 집에서 100세 노인의 수발을 들며 덤덤하게 진행되는 레베카의 일상은 일견 서글프기도 하다. 그러나 남편이 남긴 낡은 집에 ‘오픈 암스’(‘우리 집으로 오세요’라는 뜻)라는 이름을 짓고 각종 파티를 베푸는 것을 직업으로 삼게 된다는 아이러니한 설정은 자칫 청승스럽게 흐를 뻔한 레베카의 운명을 각종 파티의 주인공으로 바꿔놓는다.
매일매일을 파티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 게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파티일 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허감은 자연스럽게 레베카에게 찾아든다.
“세 아이를 돌봐야 하고, 사업도 내가 짊어지게 되었어. 아픈 시어머니, 상처한 숙부, 사춘기에 접어든 시동생과 한 집에서 부대끼며 살았어. 완전히 다른 길에 접어든 듯했어. 원래의 나에서 자꾸만 자꾸만 멀어지는 거야. 한데 올 여름, 정신을 차렸어. 주변을 둘러봤지. ‘내가 어떻게 변한 거야? 내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지? 내 인생에 입양된 사람 같잖아! 달리 표현하면 그건 내 인생이 아니었어. 다른 사람의 인생이었지.”(p.196)
소설의 많은 부분은 레베카가 첫사랑의 재현을 기대하면서 처녀 시절의 품위 있던 모습을 되찾으려고 애쓰는 과정을 아름답고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담아낸다. 첫 사랑을 만나러 가는 길에 제발 바보처럼 보이지 않기를, 얼굴에 바른 파우더가 눅눅해지고 사방팔방으로 날리는 머리 매무새를 걱정하는 레베카의 처지가 무척 재미있게 감겨드는 것은 앤 타일러 소설이 지닌 막강한 전략 덕분이다. 상실감이나 그로 인한 우울한 운명 따위보다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은 순간 웃으며 지낼 수밖에 없는 일상을 부각시키기. 그것을‘햇볕전략’이라 불러도 될까? 이 전략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던듯 다시 다른 사람을 위한 파티 일정을 조정하는 레베카의 덤덤한 귀한은 더 이상 안쓰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 어떤 삶이든 후회가 찾아들지 않는 경우는 없다. 조금씩 속도가 다를 뿐, 이렇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그런 순간이 찾아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변변한 이유도 없이 헤어진 첫사랑의 연락처를 뒤적일까, 아니면 어긋났다고 생각되는 지점의 끝을 향해 조금씩 뒷걸음쳐볼까. 강요하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오래 전 우리가 어른이었을 때’라는 이 소설의 원제는 앤 타일러 식의 혜안을 준다. 후회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어른이고, 뒷걸음쳐 되돌아가고만 싶은 그 시절에 역시 우리는 이미 어른이었다. 그러니 그 어떤 순간을 후회할 수 있으랴. (이현희 imago@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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