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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아름다운 삶 |  | |
| 金恩惠씨, 삼성복지재단 2002년 효행大賞
병마에 쓰러진 부모·오빠·언니… 결혼도 미룬 채 病수발
올해 마흔다섯 살의 보험설계사인 김은혜(金恩惠·45·경기도 평택)씨가 삼성복지재단이 선정한 2002년 효
행상 대상(大賞)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씨의 잘 매만져진 머리 등 세련된 외모가 흔히 생각하는 ‘효행상
수상자’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것들 하나하나가 힘겹게 보낸 세월의 한자락이다.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김씨의 고교 시절은 가족의 우환(憂患)과 함께한 3년이었다. 서울에서 목재소를
하던 아버지가 사업 실패와 함께 중풍으로 쓰러졌고, 둘째 오빠와 둘째 언니가 차례로 정신질환을 보인
것이었다. 손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버지와 정신질환을 앓는 오빠·언니를 돌보는 일은 김씨의 몫이었
다.
사는 것이 너무 괴로워 그는 한때 집을 나와 친구집에 숨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가족을 잊으려 해도 보
따리장사를 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고, 며칠 만에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머니와 함께 분식집을 하기도 하고 양장점에 취직해 경리일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식구들
의 병원비를 대기에는 월급이 턱없이 부족했다.
90년대 초 오빠가 집 옥상에서 몸을 던져 중환자실에 실려갔을 때는 매달 내야 하는 병원비만 2000만원
이 넘었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마저 당뇨와 패혈증으로 쓰러졌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빚을 내 서울
강남에 갈비집을 열기도 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김씨
는 사귀던 사람과 약혼을 했지만, 약혼자 집에서 가족 사정을 들어 파혼해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
다.
“그냥 혼자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혼자 죽고 나면 저 불쌍한 사람들을 어쩌나 하는 생
각만 들었어요.”
김씨가 서울 생활을 접고 평택으로 내려가 보험설계사로 나선 것은 지난 97년. 갈비집 등을 정리해 병원
비로 썼던 빚을 대충 갚은 뒤였다. 김씨는 보험설계사를 해보라는 친구의 권유를 듣고 망설이다가 용기
를 냈다.
『보험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어 처음에는 매일 울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스
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그날 하루 만나야 할 고객에 대해 점검을 거듭했고, 영업소에도 누구보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매일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일한 결과 3년 만에 월 500만원 정도
의 수입을 벌게 됐고, 한 달에 십수 차례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어머니의 병수발에 숨이 트이게 됐다. 오
빠는 용인에서 입원 치료를 받게 하고 있고 언니도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제가 죽을 때까지 가족들의 뒷바라지는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기보다는 제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제가 재정적으로 더 풍족해져 가족조차 없는
버림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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