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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외설과 예술 사이, 장정일의 ´속´ 들여다보기
˝내 나이 열 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 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세상에는 친(親) 장정일 파와 반(反) 장정일 파가 있다고 나누어 볼 때, 예나 지금이나 내가 전자 즉 장정일을 좋아하는 부류에 과감하게 손을 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 때문이다. 10년 전 출간된 장정일의 소설 「아담이 눈 뜰 때」의 초입에 쓰인 이 구절을 읽고 또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세상 그 어떤 시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어떤 영화가 이보다 더 비애로울 수 있을까, 그 어떤 선언문이 이보다 더 비장할 수 있을까. 재수생의 신분으로 은선, 현재, 그리고 40대의 여류 화가와 아무 뜻 없이 성관계를 맺어나가는 19살 소년 ´아담´을 통해 그가 결국 말하고 싶었던 건 글(´타자기´)과 예술(´뭉크화집´)을 향한 욕망, 그리고 어눌한 환경으로부터의 해방의지(´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장정일과 그의 문학을 아끼는 이들, 혹은 그를 향한 편견을 좀체 벗어 던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쓰여진 이 책은 가히 ´장정일 연구서´라 부를만하다. 제목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우선 장정일을 우리 시대 하나의 화두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화두는 과연 어떤 문화적 코드를 함축하고 있는가를 인간으로서의 장정일, 작가로서의 장정일, 그가 낳은 작품을 보여주며 증명하려 애쓰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철하의 작가론, 전직 문학담당기자에서 평생의 친구로 바뀐 남재일의 속 깊은 작가 인터뷰, 일명 ´거짓말 사건´에서 장정일의 변호사였던 강금실의 변론기, 영화 평론가 전찬일의 영화 비평 등 이 책을 구성하는 글들은 모두 장정일의 편에 서서 그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될 수 있는 까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인간의 내적, 외적 생활에 있어 사회적으로 은폐되어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사실들을 들추어내어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책에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언술체계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p.191)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작가 장정일은 1997년 장선우 감독의 영화 「거짓말」의 원작자라는 이유로 기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은 바 있다. 그때 대법원은 그의 소설을 두고 ˝소설의 3/4 이상이 폰섹스, 구강성교, 항문성교, 가학 및 피학적인 성행위 등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묘사방법도 노골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그러한 묘사부분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 사건 소설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다´며 엄연한 ´음란물´로 규정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장정일=외설, 음란, 포르노의 생산자>라는 등식으로 기억하고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 아닌 편견은 ´거짓말사건´에 대해 ˝공격이 있으면 방어가 있는 것 아니겠심니꺼. 저는 예상했었고, 거기에 불만없심더. 공격자만 있고 방어는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도 없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지요.˝(p.29)라는 장정일의 단호한 답변을 옮겨 적은 구절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장정일 자신이 최근에 적어내려 간 단상을 엮은 장 ´아무것도 몰라요´를 조금만 더 촘촘히 들여다보자. 그러면 포르노 소설을 써 ´감방´까지 갔다온 작가 장정일이 아닌 다른 얼굴이 서서히 눈에 보일 테다. 머리 깎는 데 드는 돈이 아까워 바리깡으로 손수 혹은 나이든 노모의 손을 빌어 머리를 깎는 작가 장정일, 동네 꼬마의 자전거에 꼬마 대신 일흔 번 펌프질을 해주고 숨이 가빠하는 마흔 살 남자 장정일, ´서정주의 친일 이력과 역대 독재 정권에 대한 추파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소위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고귀한 신분에 맞는 높은 도덕성이라는 기준을 적용할 때, 그의 허물에 사형 선고를 내릴 만하다´(p.114)고 주저 없이 말하는 장정일, 작가의 삶과 문학의 불일치야말로 ´표절´이라고 말하는 장정일, ´나는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변변한 졸업장도 없다. 배운 기술이라곤 글쓰기 뿐´이라고 푸념하는 가난하고 못 배운 작가 장정일….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가 장정일 이전에 인간 장정일의 내밀한 속내를 엿볼 수 있는 도움말과도 같다. 이 책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글이 그렇듯이 나 역시 바랄 뿐이다. 그가 제발 사회의 평균적 도덕에 반하는 음란한 소설을 써내 구속된 작가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오히려 ´지난 수년 간 자신의 상상과 표현을 한계 없이 실행에 옮겨 본´ 몇몇 드물고 귀한 사람의 하나로 이해되기를.
(이현희 imago@libro.co.kr/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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