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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이 속 같은 세상
참 알고도 모를, 호두 속 같고 우렁이 속 같은
“우리의 류씨는 이를 온새미로 먹어버리는 게 아니라 피만 빼먹고 껍데기는 톡톡 뱉어버리는 것이었다. 흡사 해바라기씨라도 까먹는 것 같은 그 숙련되고도 또 재치 있는 입놀림. 한마디로 그것은 절기(絶技)랄 밖에 말할 도리가 없었다.”
중국 연변에 거주하는 소설가 김학철씨가 최근 펴낸 산문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창작과비평사) 중 〈이와의 전쟁〉이란 글 속에 담긴 내용이다. 이 글에서 김학철씨는 루쉰의 《아큐정전》 중 이를 씹어먹는 왕텁석부리를 부러워하는 아큐에 관한 구절을 소개한다. 《아큐정전》의 왕텁석부리야 이를 통째로 씹어먹었지만, 문화혁명 당시 반혁명분자로 수감된 김학철씨가 만난 류씨는 피만 빼먹고 몸통은 버리니 한 수 위라고 말할 수 있다.

김학철씨는 1916년 생이니 우리 나이로 86세인 셈이다. 그 세월 동안 김학철씨는 조선의용대에 입대했다가 일본 나가사끼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고 195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20세기의 신화》 필화사건으로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말하자면 20세기를 고스란히, 그것도 가장 요란스럽게 겪어온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스레 《우렁이 속 같은 세상》에는 이 요란스런 삶이 남긴 자취가 담겼다.

이 삶의 자취에는 20세기 후반부를 거치는 동안, 한반도에서 점차 지워지고 있는 본디 우리말 표현법과 연륜과 경험을 쌓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해학이 담겨 있다. 예컨대 이런 대화가 눈길을 끈다.

“여긴 왜 나와 서셌어요?”
“정류장까지…… 배웅을 해드리려구요.”
넉적스레 대답을 하는 나.
“아니 고만두세요. 혼자도 넉넉히 갈 수 있에요.”
“그렇지만 밤인데…… 어떻게 혼자서……”

1930년대에 나온 박태원의 《천변풍경》에서나 읽을 수 있는 본디 서울말이 이처럼 김학철씨의 기억 속에서는 살아 있는 것이다. 김학철씨의 기억 속에 살아남은 것은 이 같은 말뿐이 아니다. 상하이 외국 조계의 풍경과 그 안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가들, 1949년에 만난 소설가 김사량, ‘기생집 갈보들’이나 앉아 있던 60여 년 전 활동사진관 부인석, 가회동에 살던 화신상회 사장 박흥식씨 장모 회갑연 등의 모습도 생생하게 전해온다.

이 책은 1986년부터 《연변일보》 등에 기고한 산문들을 모아 엮었는데, 줄기에 달려오는 고구마들처럼 한 가지 사건이나 생각을 따라 갖은 체험과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진다. 이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작가만이 쓸 수 있는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연륜이 재치 있는 생각으로 연결됐다가 능청스런 문장으로 터져나 가만가만 따라 읽다보면 절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대목이 한두 개가 아니다.

전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통해 사회주의 중국의 실상을 에둘러 보여준 〈전화에 얽힌 기막힌 사연〉이나 서울 특급호텔의 비데를 설치한 화장실과 호화 레스토랑에서 겪은 일을 담은 〈호화판 생고생〉 등은 이 노작가의 입담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글들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 이 책은 독립군의 최대 업적으로 일컬어지는 청산리·봉오동 전투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밝히기도 하고(〈독립운동사의 과대망상증〉), 윤동주 독살설 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0세기의 전설들〉).

하지만 옛 이야기를 전해듣는 듯 유쾌한 독서가 계속되는 와중에 가슴이 아픈 대목도 없지 않다. 〈불효자의 탄식〉에서 김학철씨는 일본 감옥에 수감됐을 당시 누이와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전한다. 해방된 뒤에 누이는 연안에서 돌아온, 조선의용군 출신의 왕련과 결혼했다. 나중에 김학철씨가 연변에 정착한 뒤에 공군사령관이었던 왕련은 숙청의 피 바람에 휘말려 총살당하고 누이와 어머니는 행방불명이 돼 버렸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결국 누이와 어머니는 해방된 조국에서 행방불명이 되고 본인은 이국을 떠도는 신세가 된 셈이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제목이 ‘우렁이 속 같은 세상’이 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by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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