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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끼리를 쏘다 |  | |
| 한국에서 오해받은 조지 오웰, 드디어 복권되다
우리에게 조지 오웰은 오랫동안 ‘반공작가’로 기억되어왔다. 「1984년」, 「동물농장」이 각각 스탈린주의와 볼세비키 혁명에 대한 우의적 비판이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반공작가로 소개되지 않으면 전체주의에 맞서 강력하게 투쟁해온 ‘자유주의자’ 정도로 소개되어온 것에 그쳤다. 지난 6월 25일은(공교롭게도 한국전쟁 발발일과 겹친다!) 조지 오웰 탄생 100주년이었다. 그와 함께 조지 오웰을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는 책들이 출판되었다. 평전 「조지 오웰」과 조지 오웰의 산문집 「코끼리를 쏘다」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조지 오웰이 반공작가로 인식된 데에는 역사가 있다. 오웰의 작품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해석되면서 냉전시대 미국의 소련 비판에 적극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냉전의 대치상태가 극명하게 드러난 한반도에서 「동물농장」이 영어로 출간된 지 3년만에 세계 최초로 번역되는 기염(?)을 토한다. 미국 해외정보국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이러니 한국에서 조지 오웰이 반공작가로 오해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조지 오웰은 실제로 어떤 작가인가? 인물을 새로 바라보는 평전을 연속적으로 내놓고 있는 박홍규 교수에 의하면 조지 오웰은 인간의 자유와 자치, 그리고 자연을 존중한 새로운 사회를 꿈꾼 ‘아나키스트’였다는 것이다. 「코끼리를 쏘다」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민주적 사회주의자’이다. 어떤 평가가 옳을까? 아마 둘 다 맞을 것이다. 오웰은 1936년 서른 셋의 나이에 아나키스트 그룹의 일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좌파연합인 ‘인민전선’이 당시 최대 조직이었던 아나키스트 그룹 FAI와 CNT의 암묵적 지지 아래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집권에 성공하지만, 곧바로 프랑코의 우익 쿠데타를 맞아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프랑코를 지원하고 전 세계 좌파진영이 인민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에 모이게 되면서 전 세계적 대립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내전은 그러나 그 뒤 좌파연합 내부의 갈등이 좌파간의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조지 오웰은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해 분노했고, 이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 「카탈로니아 찬가」이다. 이것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의 원작이기도 하다. 이 참전에 대해 조지 오웰은 “스페인 혁명은 나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1936년 이후 나의 모든 작품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고자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후 오웰은 모든 종류의 폭력에 맞서고 전체주의와 맞서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목도한 민중과 노동자의 삶, 제국주의 침략자의 지배하에 신음하는 식민지의 현실, 이상과 대의를 자양분 삼아 시작된 혁명이 한낱 권력투쟁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폭로했다. 이런 점이 인정되어 「1984년」과 같은 작품은 미국의 맑시스트 잡지인 ‘파르티잔 리뷰’에서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에서 조지 오웰이 반공작가로 알려진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반공작가라는 인상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웰의 진면목을 알기 어려웠지만, 영문학사에서 오웰은 큰 자취를 남긴 작가로 평가된다. 영국의 BBC 방송이 지난 1999년에 실시한 여러 조사 가운데 ‘지난 천년간 최고의문학가’ 부문에서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4위가 찰스 디킨스, 7위가 제임스 조이스, 8위가 도스토예프스키인데 비해 오웰이 3위라니 국내독자들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SF 영화의 신기원을 일궈낸 조지 루카스가 조지 오웰의 작품에 열광하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단편영화를 만들 정도로 대중적이었으며 그의 공헌은 다방면에 걸쳐있다(우리는 종종 오웰의 작품이 SF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코끼리를 쏘다」는 조지 오웰의 문학적 역량은 물론 그의 감수성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산문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것은 〈교수형〉이다. 형장으로 향하는 죄수가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발견하고 살짝 피한다. 곧 죽을 사람이 웅덩이를 피하는 것을 보고 오웰은 이렇게 생각한다.
“곧 사형될 사형수의 이런 행동은 이상했지만,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 사형수가 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발걸음을 딴 데로 옮기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신비감, 다시 말해 생명이 한창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생명을 앗아가는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보았다.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하고 예견하고 추리한다. 비켜간 웅덩이에 대해서까지 생각하고 있다.”(P.27)
이 책에 실린 산문들은 짧지만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그의 문장이 뽑아내는 감수성은 정결하고, 그의 주장은 명석한 빛을 발한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예술이 정치적 태도와 관계가 없다고 하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이다’와 같은 간명한 구절이 많이 들어있는 〈나는 왜 쓰는가〉, 톨스토이의 비난에 맞서 셰익스피어를 옹호한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학관을 드러낸 산문이나 〈복수는 괴로운 것〉, 〈스포츠 정신〉등의 사회비평은 정말 유리창과 같은 의식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한 잔의 맛있는 차〉, 〈책 값 대 담뱃 값〉에서는 그 집요함에 놀라게 된다(읽어보면 그 집요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산문은 좋은 시가 달성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투명한 차원을 지닌다고 생각해왔다. 조지 오웰의 산문집도 그러한 산문 중의 하나에 든다. 어쨌거나 오웰은 오해로부터 복권되어야 한다.
by 리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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