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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성생활
섹스에 대해 얘기하실래요?
몇 년 전,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보면서 엉뚱한 상념에 빠진 적이 있었다. 세 명의 처녀들 틈에 끼어 가끔씩 맞장구도 치면서 음식을 집어먹는 조재현의 모습을 보며 과연 우리나라에 저럴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굳이 성관계를 갖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남녀가 몸을 섞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나눌 수 있다면 성이란 게 한결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게 상념의 요지였던 셈이다. 왜, 우리는 같이 ‘하지’ 않는 이성끼리는 그것에 대해 입다물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 순간 정작 근질근질했던 건 ‘거기’가 아니라 ‘입’이었다.
1999년부터 2년 동안 프랑스에 거주하는 140명의 남녀를 일대일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는「현대인의 성생활」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책은 프랑스 노동부 산하의 건강에이즈국의 외뢰를 받은 여성 사회학자 자닌 모쉬-라보가 나이, 계층, 정치적 입장 등을 고루 안배한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성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글쓴이의 말마따나 그녀가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21세기판 킨제이 보고서〉라는 부제가 딸려있다. 1948년에 발표된 「킨제이 보고서」는 충격적인 성 실태 보고서였다. 그 당시 미국인들의 성생활 백서라 할 수 있는 그 보고서는 ‘침대 속 생활’을 일일이 데이터화함으로써 공적 통계에 의한 사적 생활의 평균적 기준을 제시했다. 일테면 성적 방종에 대한 제어와 자유에 대한 지침을 내면화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하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 「킨제이 보고서」의 내용이 여전히 유효한 지는 의심스럽다. 「현대인의 성생활」의 출간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시의적절해 보인다.

「킨제이 보고서」가 단순히 양적으로 축적된 통계에 기반한 분석이었다면, 이 책은 질적 통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글쓴이에 따르면, 질적 조사는 성생활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정서적 측면의 소중한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남성은 평생 11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나누고 여성은 3,3명에 불과하다는 식의 통계(물론 프랑스의 경우다)는 실제로 성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실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성생활은 공적인 잣대로 함부로 단정짓지 못할 만큼 개인적인 비밀들을 많이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생활은 단순한 개인적 삶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적인 코드, 경제적인 문제, 도덕적인 관념까지 포괄하는 성생활은 그것이 얽혀있는 범주만큼이나 다양한 공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에 실린 140명의 고백은 아주 내밀한 개인적 비밀에서 출발해 범인류적인 사안들의 초석들을 건드리는 동시에,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 삶의 뿌리까지 진동하게 만든다.

배우자와 자식이 있는 동성애자, 성전환자, 3000여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한 남성 스트립댄서, 한 사람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양성애자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성생활 실태는 여느 성애영화의 자극적인 장면들에 못잖을 정도다. 쉽게 말해 ‘변태’라 불리는 성적 취향과 행위들도 심심찮게 나온다. 특히, 거의 세계 최초로 이슬람 여성들의 성생활과 성의식을 고백하는 대목은 이 책을 더욱 의미 깊게 한다. 어머니조차 딸에게 성에 대한 얘기를 금기시하는 이슬람 여성들의 정신적 육체적 트라우마에 관한 최초의 고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의 성생활을 엿보는 관음증적 욕구만을 충족시키면서 키득거리거나 개인의 영혼에 상처로 남은 갖가지 성적 양태들에 고루한 도덕적 관념만을 내세우게 된다면 백해무익하다. 글쓴이는 사람들과 인터뷰하고 나서 “성은 이렇게 인생 전체가 걸린 문제였다”고 결론짓는다. 그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 우리는, 특히 성에 관한 한 지나친 편견과 억압에 길들여진 대∼한민국 국민들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쉬쉬하는 강박에 너무 오래 시달려왔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성관념과 우리의 그것이 일대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문화적 차이를 갖고 있는 건 인정하더라도 어차피 성은 알몸끼리 부딪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은 평등하다”는 글쓴이의 주장은 과거가 은폐한 진실보다는 미래의 새로운 인간학을 세우는 데 만국공용의 캐치프레이즈가 될 수 있을 법하다. 자, 지금 당신의 섹스는 어떠한가? 몸을 열기 전, 마음과 입을 열고 당신의 고뇌를 이야기하시라.


by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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