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글 나누기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찬란한 믿음 (송재찬)
197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 찬란한 믿음 송재찬 소라 껍데기가 하나 풀숲에 버려졌습니다. 깊은 바다, 따뜻한 물 속에서 자란 소라 껍데기는 춘삼월 꽃바람이 몹시도 추웠습니다. 그리움을 노래하듯 남실거리는 물결소리 - 파도의 발목에 매달려 바다를 여행하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노라면 빈 가슴은 하늘처럼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빈 가슴. 껍데기만 남은 소라는 ´빈 가슴의 소라´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빈 가슴으로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다른 것으로라도 채워 보렴. 그러면 고향을 조금은 잊을 수 있을 거야.˝ 누구에게나 친절한 봄바람의 말입니다. 정말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워진 가슴을 채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람이 떨어 담아 준 꽃잎으로 채워 보기도 했고, 하얀 새 울음으로 채워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시들어 버렸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작지만 예쁜 꽃들이 들판을 장식하기 시작하자 나비와 벌레들이 소문처럼 몰려다녔습니다. 그러나 소라에게는 나비 한 마리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다는 것 - 그것은 고향을 잃은 것보다 더 슬픈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소라 껍데기야.´ 소라는 잠 안 오는 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꽃들이 낮에 사귄 나비와 벌을 생각하며 포근한 꿈에 젖어 있을 때, 소라는 별을 보았습니다. 모두 눈감아 버린 밤에 혼자 눈 뜬 별처럼 고귀한 게 또 있을까요? ´별처럼 아름다운 것으로 가슴을 채울 수만 있다면...´ 이튿날 소라는 무겁게 채워진 가슴을 남의 몸처럼 느끼며 눈을 떴습니다. 머리가 무겁습니다. 소라의 가슴을 채운 것은 거름 냄새. 이웃 채소밭에서 날아온 지독한 냄새였습니다. ´아, 나는 별처럼 아름다운 것으로 가슴을 채우고 싶었는데, 내 가슴이 더러운 거름 냄새라니.´ 소라는 끙끙 앓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을 계속해서 사람들은 바쁘게 거름을 날랐습니다. 여름 소나기가 하늘을 씻었습니다. 소라의 가슴도 하늘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소나기가 씻어 준 하늘에 무지개가 걸린 날, 소라는 생각했습니다. ´빈 가슴을 채우려는 내 꿈도 어쩜 저 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게 아닐까? 허무한 꿈-´ 보리 익는 냄새가 미루나무 잔가지에 걸려 부서집니다. 저녁에 비가 내렸습니다. 풀잎들이 부퉁켜 안고 소리쳤습니다. ˝장마비야. 조심해야 해.˝ 그러나 소라는 즐거웠습니다. 빈 가슴을 음악처럼 간질이는 비의 감촉은 바다의 찰싹이는 물결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뿌지직-˝ 냇가에 몇 그루 있던 미루나무의 가지가 꺾어집니다. 비바람이 점점 더해 갑니다. 떼를 이룬 빗물이 소라를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자갈을 숨겨 안은 소라의 몸을 마구 때렸습니다. 소라는 빈 가슴 가득 빗물을 담고 더 깊은 골짜기에 살게 되었습니다. ´내 가슴은 이제 빗물이 되고 말았구나. 아무 향기도 없는 빗물.´ 점처럼 별이 찍힌 하늘을 보며 소라는 울었습니다. 제 힘으로 가슴을 채울 수 없다는 절망감이 눈물로 쏟아집니다. ˝너무 슬퍼 말아요. 나처럼 보잘 거 없는 빗물도 때로는 큰일을 해낼 수 있답니다. 아름답다고 다 좋은 건 아니에요.˝ 가슴에 고인 빗물의 이야기입니다. 소라 껍데기는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암만 그래 봐야 넌 향기도 없는 빗물이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은하수의 긴 물결 소리가 땅에까지 들릴 것 같은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소라는 깜짝 놀랐습니다. 별 하나가 꽃잎 떨어지는 듯 소라의 가슴에 내린 것입니다. 너무나 기뻐 소라는 소리도 지를 수 없었습니다. ´아, 별님이 스스로 내 가슴에 내려와 주다니.´ 꿈 같은 일이었습니다. 너무 향그러운 별님이기에 소라는 불안해졌습니다. ˝별님, 별님도 곧 떠나가겠지요?˝ 곧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라는 슬프게 물었습니다. ˝아뇨. 이 빗물만 있음 난 언제나 소라님의 가슴에 내릴 수 있어요.˝ ˝네? 빗물이 있어야 해요?˝ ˝그럼요.˝ 소라는 부끄러웠습니다. 보잘 것 없는 빗물이라고, 이야기도 안 했는데... ˝세상엔 쓸모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보잘 것 없는 풀한 포기가 배고픈 양을 살릴 수도 있어요.˝ 별님의 말입니다. 소라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가뭄이 계속되었습니다. 소라의 가슴에 고인 빗물까지 해님은 모두 말려 버렸습니다. 별님은 빗물이 말라 버린 날부터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고향을 생각할 때보다 빤히 보이는 별을 생각하는게 더 안타까웠습니다. 날마다 비를 기다렸습니다. ˝소라야, 다시 별이 네 가슴에 내린다 해도 너는 영원히 별을 가질 수 없어. 물은 또 마를 테니까.˝ 고추잠자리의 말입니다. 달빛이 묻은 버드나무 가지에서 납니다. ˝그럼 어떻게 하니, 고추잠자리야?˝ ˝네가 별이 되렴.˝ ˝내가?˝ 소라는 웃고 말았습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소라야. 게다가 이젠 껍데기뿐이란다. 빈 가슴만 지닌 내가 어떻게 별이 되겠니?˝ ˝아니야, 나는 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소라 껍데기를 알고 있어. 그렇지만 믿음이 잇어야 한단다. 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너도 별이 되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니?˝ ˝아니, 나는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게 꿈이란다.˝ 소라는 가만히 잠자리의 말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이제 잠은 저 먼 세상으로 가 버린 듯 소라의 정신은 더욱 초롱초롱해졌습니다. ´정말 나도 별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다시 바다에 갈 수도 있을 텐데. 별님이 그랬지. 물이 있는 데는 마음대로 내릴 수 있다고. 그래, 나도 별이 되자. 그래서 고향엘 가자.´ 그 날부터 소라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했습니다. 눈에 익은 어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듯 솟아오를 때까지 소라는 별이 되지 못했습니다. 세월은 소라의 몸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구멍이 몇 개 송송 뚫렸습니다. 별이 되리라던 믿음에도 어느 날 구멍이 생겼습니다. ´별이 될 수는 없을 거야. 그 고추잠자리는 내가 불쌍해서 불쑥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믿고 별이 되는 꿈만 꾸었어. 병신이야, 바보야. 멍텅구리야. ....나는.´ 소라는 갑자기 더 외로워졌습니다. 소라의 슬픔처럼 눈이 옵니다. 어둠이 안개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소라야, 믿어야 돼. 너는 별이 될 거야.´ 어디선가 고추잠자리의 소리가 바람처럼 소라 껍데기를 스쳐 갔습니다. ´그래, 믿어 볼게. 믿을게.´ 소라는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몇 년 동안 쌓아 온 믿음이라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얏!˝ 소라는 갑자기 비명을 질렀습니다. 누가 허물어져 가는 제 몸을 꽉 누르는 게 아닙니까? ˝아이, 미안해. 눈이 쌓여 보여야지. 아니 근데 넌 소라 껍데기구나. 이 산골에까지 굴러 오다니, 불쌍하군.˝ 날씬한 사슴은 조금 건방스럽게 말했습니다. ˝불쌍하긴요. 사슴님이야말로 이 추운 데 웬일이세요? 난 별이 될 거니깐 괜찮아요.˝ 사슴은 깜짝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소라 껍데기가 그처럼 자신에 넘친 이야기를 하다니...... 웃어넘길 수 없는 믿음이 그 말속엔 숨어 있었습니다. 소라 자신도 말해 놓곤 놀랐습니다. 오랫동안 품어 온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말이 되어 나온 것입니다. ˝사슴님, 어디 가는 길이세요? 어두워지는데.˝ 소라가 다시 물었을 때, 사슴은 당당하던 자세를 잃고 슬픈 눈빛이 되고 말았습니다. ˝난 내 아기를 찾아다닌단다. 우리 집은 저 산너머 깊은 산 속이었어. 그런데 지난 여름 사람들은 내 고향의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며 그 산을 모두 차지해 버렸단다. 큰 관광호텔이 생기고 아스팔트가 산을 가르고.... 우리 사슴들은 사람에게 잡히기도 하고 나처럼 쫓기다가 가족을 잃기도 했단다.˝ ˝사람들은 왜 사슴님을 잡으려 하나요?˝ ˝이 뿔 때문이야. 이 뿔은 사람들의 귀한 약이 된단다.˝ ˝어쩜! 남을 위해서 제 몸 한 쪽을 내줄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아요?˝ ˝그렇지만 이젠 다 글렀어. 내 뿔은 이제 약이 안 될 거야.˝ ˝아니, 왜요?˝ ˝생각해 보렴. 사슴뿔이 약이 되는 것은 저 깊은 산 속 그윽한 산의 정기를 지닌 때문이었지.˝ ˝그런데요?˝ ˝나는 지금 숨어살고 있단다. 사람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어둠을 타고 다니는걸. 내 뿔을 키우는 건 이제 맑은 공기도 아니고, 천 년 묵은 산바람의 노래도 아니고, 거울 같은 샘물도 아니야. 그리움과 미움이란다. 고향과 아기에 대한 그리움, 사람에 대한 미움.˝ 사슴은 또 말했습니다. ˝소라야, 넌 별이 된다고 했지?˝ ˝네.˝ ˝별이 되면 우리 아기를 찾아봐 줘.˝ ˝네, 찾아서 알려 드릴게요.˝ ˝고마워. 그 대신 너를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데려다 줄게.˝ ˝정말요? 여긴 응달이라 너무 추워요.˝ ˝그래, 너는 정말 별이 될 거야. 네 목소리엔 믿음이 서려 있단다.˝ 사슴의 이야기는 소라를 힘나게 합니다. ´고마워요. 사슴님. 믿음이 힘이라던 고추잠자리의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사슴은 조심히 소라를 물고 어둠 속을 걸었습니다. 어둠 속에 큰 길이 길게 누워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마차가 달가닥 달가닥 굴러 오고 있습니다. ˝사람이야! 미안해. 소라야, 다시 보자.˝ 소라 껍데기를 길 가운데 버리고 사슴은 바위 뒤로 숨었습니다. 마차 소리가 가까이 굴러 왔습니다. 달가닥 달가닥 .... 묵직한 쇠 바퀴가 소라 껍데기 위로 지나갑니다. ˝아, 아.˝ 소라 껍데기는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사방이 갑자기 환해집니다. 달구지 소리가 어느 새 물결 소리로 찰싹이며 멀어져 갑니다. ˝아, 아....˝ 소라는 파도의 발목을 붙잡고 어디론가 떠날 때의 기분입니다. 아니, 지금 떠나고 있습니다. 숨어 있던 사슴은 보았습니다. 소라 껍데기를 버렸던 그 분명한 자리에 눈부신 빛 물결이 출렁이는 것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반짝거리던 빛 물결이 한 덩이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라 껍데기의 믿음이 하늘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
 
비즈폼
Copyright (c) 2000-2025 by bizforms.co.kr All rights reserved.
고객센터 1588-8443. 오전9:30~12:30, 오후13:30~17:30 전화상담예약 원격지원요청
전화전 클릭
클린사이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