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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쁨이 ( 조한순 ) |  | |
| 1987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 )
기쁨이
조 한 순
동해바다를 물들인 해가 산을 몇 개 넘어 풍덕리 마을 앞산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움막의 손바닥만한 봉창으로 햇살 한웅큼이 들어와 박씨를 찾았지만 벌써 나간 뒤였습니다.
박씨의 움막 언덕너머에 ´무애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박씨는 철들고 나서부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삼십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종각을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했습니다.
밤사이 종각 옆에는 낙엽이나 지푸라기 등으로 지저분해집니다. 청소를 말끔히 끝내면 종에 새겨진 관음보살님도 기분좋은 얼굴로 구름을 타고 오르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관음보살님 관음보살님.˝
박씨는 청소를 할 때 늘 관음보살님만 부릅니다.
남들처럼 딸린 식구가 없으니 부자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아내가 없으니 자식을 원하지도 않았고, 얘들이 없으니 입학시험 걱정도 없습니다.
박씨는 그저 ´관음보살님´하고 마음 속으로 부르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잔잔한 호수같이 한없이 맑고 편안해집니다.
하루는 종을 치시는 설봉스님께 여쭈었지요.
˝스님, 와 종은 요렇게 새벽에 칩니껴?˝
˝네, 사바중생이나 지옥중생들이 부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종소리를 듣고 어서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새날이 시작되는 새벽의 고요 속에서 치는 것입니다. 종소리는 지옥의 철문도 뚫을 수 있으니, 이 소리를 들으면 고통에서 구제가 됩니다.˝
˝아이고, 고마우신 부처님!˝
그 뒤로 박씨는 더 열심히 종각을 청소했습니다. 박씨가 부처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공양이었습니다.
박씨는 마흔살이나 되었는데도 이 풍덕리에서는 그냥 박씨입니다. 온동네 허드레일을 군소리없이 하는 동네 머슴입니다. 댓가로 받는 것이야 먹을 만큼의 보리나 쌀 조금이지만, 세끼 때를 굶지 않으니 마음은 넉넉합니다.
가끔 동네 아주머니들이 푸성귀며 김치나 장을 퍼 주어 끓여 먹고 혼자 삽니다.
박씨는 웃을 일이나 화낼 일에도 씨익 웃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니 아이들도 ´바보 박씨´라고 부르지만 화를 애시당초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몇 마디 말을 하면 모두 웃거나 놀리기 일쑤입니다.
˝박씨는 순 바보데이!˝
˝우짜 맹추같은 말만하노!˝
그래서 박씨는 숫제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초겨울이었습니다. 집집마다 김장도 끝낸 마을은 한 장 남은 겨울 달력의 풍경그림처럼 쓸쓸했습니다.
박씨는 움막에 앉아 손바닥만한 봉창의 유리를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눈이 오시겠데이!˝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휑뎅그렁한 황보아저씨 배추밭에 누군가 있었습니다.
˝아직 일이 쪼매 남으셨나?˝
박씨는 중얼거리며 누덕누덕 기운 겉옷을 걸치고 서둘러 밭으로 나갔습니다.
˝아즈므이예, 뭐합니꺼?˝
박씨는 멈칫거리며 물었습니다. 고개를 휙 들고 보는 얼굴이 낯설었습니다. 빨갛게 언 손에는 흠이 잔뜩 묻은 배추뿌리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이 곧 울음이 터질 것같았습니다.
옷매무새가 몹시 초라했습니다. 찢어진 치마에 맨살의 정강이가 얼어서 푸르딩딩합니다.
박씨는 얼른 배추뿌리를 몇 개 더 캐서 여자에게 내밀며 씨익 웃었습니다. 여자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치마폭에 배추뿌리가 가득해졌습니다.
˝이리 오이소.˝
여자가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는 듯 했습니다.
˝이리 오이소. 우리 집에 가서 묵읍시더!˝
박씨가 조심스럽게 움막을 가리키며 손짓을 하였습니다.
여자는 곁에 둔 보따리도 잊은듯 배추뿌리만 들고 따라왔습니다. 박씨가 보따리를 들고 앞장을 섰습니다.
하늘에서 눈발이 희끗희끗 날렸습니다. 멀리 굴뚝에서 점심짓는 연기가 낮게 피어올랐습니다.
비닐로 된 움막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가 얼어버린 코끝을 감싸주었습니다.
˝들어오이소.˝
˝......˝
˝괜찮심더. 아무도 없어예.˝
침침한 방안으로 조심스럽게 여자가 들어갔습니다.
˝쪼매 있으면 밝아집니더.˝
박씨는 따뜻한 요떼기 속으로 여자를 앉게 했습니다. 박씨는 거적 문을 열고 부엌에 들어가 찬밥에 물을 한 바가지 붓고 밥을 끓였습니다.
귀떨어진 개다리 소반에 간장과 이빨빠진 사발에 김치를 수북히 담아 상을 차렸습니다.
박씨는 공연스레 신이 났습니다. 언덕 위 절에 크게 합창을 하였습니다.
여자는 웅크리고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언 몸이 녹고 허기가 져서 지친 모양입니다. 잠든 얼굴이 몹시 애처롭습니다.
˝보이소. 일나서 밥 좀 묵어보이소.˝
어깨를 몇 번 흔들자 여자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몇 날을 굶었는지 정신없이 퍼먹었습니다. 박씨는 제 그릇 것을 더 덜어주었습니다. 여자가 박씨를 보고 미안하게 웃더니 맛있게 더 먹었습니다.
˝어데서 왔습니껴?˝
˝......˝
˝성씨가 뭡니껴?˝
여자가 봉창으로 하늘을 가리킵니다.
˝하늘?˝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늘이라꼬, 하늘이, 이름이 차암 곱다!˝
박씨는 몇 번이고 하늘이, 하늘이, 하고 불러보았습니다.
˝지는 박씨라예. 어떤 사람들은 ´바보 박씨´라고 하기도 하지만서두, 아이들은 ´호박씨´하고 놀려대지예.˝
하늘이가 박씨를 보고 입을 가리고 살그머니 웃습니다. 박씨도 누런 이를 보이고 씨익 웃었습니다.
하늘이는 벙어리입니다. 아무것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하늘이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참말로 고맙습니다.˝
박씨는 더 열심히 종각을 쓸었습니다. 박씨 마음처럼 티끌 하나 없이 종각은 늘 깨끗했습니다.
˝요즘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요.˝
설봉스님이 웃음을 띠며 묻습니다.
˝예, 쪼매 그럴 일이 안있습니껴.˝
박씨는 씨익 웃습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여인네가 서있습니다.
˝아니 하늘이가......˝
박씨가 얼른 뛰어갑니다.
˝와왔능교. 날씨가 치운데, 일루 와서 스님께 인사드리소.˝
스님은 한눈에 하늘이 정해준 박씨의 각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예를 올리시지요!˝
˝지들같이 미천한 것들이 어찌 황송하게 그럴 수 있습니껴?˝
˝아닙니다. 귀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바로 귀한 사람입니다.˝
박씨와 하늘이는 부처님 앞에서 맞절을 하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내려다 보시는 부처님의 잔잔한 미소가 햇살처럼 따스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한겨울 추위에도 전보다 더 신이 나서 종각 청소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하늘이는 절의 우물을 청소하였습니다. 얼음물에 손등이 터져도 마음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봄이 되자 하늘이 배가 봉긋하였습니다.
박씨는 전보다 몇배 일을 하면서도 마냥 좋아서 연신 웃으며 다녔습니다.
늦더위가 아주 심하던 날, 밭일을 하던 하늘이가 배를 움켜쥐고 억지로 집으로 기다시피 갔습니다. 박씨는 이장댁에 일하러 가고 없었습니다.
하늘이는 있는 힘을 다해 용을 썼습니다. 온몸이 푹 젖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응애, 응애˝
아기가 힘차게 울었습니다. 하늘이는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아기의 우는 모습이 가물가물합니다. 하늘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아기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습니다.
박씨가 돌아왔습니다. 왠 일인지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방문을 급히 열었습니다.
˝아니 얼라가! 하늘아 눈 떠 봐라, 하늘아 정신차려 봐라!˝
박씨가 하늘이를 마악 흔들었지만, 하늘이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황소같은 큰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스님에게 뛰어 갔습니다.
˝스님, 이를 우짭니까? 우짜면 좋습니껴! 흑흑.˝
스님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습니다.
˝이제 하늘네는 말도 트이고 귀도 열린 세상으로 갔습니다. 모두 하늘네의 착한 마음 때문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참말입니껴?˝
˝그렇습니다. 그렇구말구요.˝
아기를 꼭 껴안은 박씨는 하늘이처럼 말을 잃은 사람 같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가 크게 울었습니다.
˝스님, 얼라 이름이나 지어주시지예?˝
하늘을 보던 스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기쁨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기쁨이, 기쁨이... 하늘이가 말이 트이고 귀도 열린 세상에 갔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지예, 좋심더!˝
박씨의 착한 얼굴에 기쁨이 나무에 물오르듯 번졌습니다.
종소리가 데엥- 뎅- 들려왔습니다.
하늘이도 이제는 저 종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니 하고 박씨는 넉넉한 가슴으로 기쁨이를 꼬옥 안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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