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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의시대
입문(入門)이란, 하나의 세계의 열림이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의 가름이다. 어떤 문을 들어서기 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의 들어섬, 그 들어섬을 기점으로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갈라진다. 그것이 바로 입문의 의미일 것이다. 여기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 한 권의 책과 함께, 이정우라는 이름과 더불어. 이정우의 <시뮬라크르의 시대>는 좋은 철학 입문서인 동시에 좋은 들뢰즈 해설서이다. ´좋다´라 함은, 접근하기 쉽다는 것을 뜻하지만, 동시에 내용의 알참까지도 함의한다. 이 책의 기본 형식은, 실제 강의의 기록이다. 하여, 평이한 진술과 해요체/합쇼체의 어미 사용이 독자를 편안하게 철학의 문으로 이끈다. 하지만 최소한의 학문적 깊이와 품격은 잃지 않으면서. 손에 잡힐 듯한 쉬운 해설과 예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엄격한 논리적 뼈대를 그 바탕에 두고 있다. 또한 논의가 언제나 꼼꼼하고 차분하게 진행되기에, 독자들 역시 차분하게 철학이라는 담론에 몰입할 수 있다. 물론 머릿속은 그칠 줄 모르는 사유의 운동을 따라가기 위해 한없이 분주할 따름이지만. 이 책의 논리적 뼈대는 들뢰즈 철학에 맞닿아 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책은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 34계열 중에서 1계열부터 17계열까지를 다룬다. 비유하자면, 1에서 17계열까지가 <의미의 논리>의 논리적 ´뼈대´라 한다면, 18에서 26계열까지는 문학적인 ´피´, 19에서 34계열까지는 과학적인 ´살´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삶?죽음?운명>에서 밝힌 것처럼, ´뼈는 철학적-논리적 토대, 근간을´, ´살이란 역사라든가, 사회과학, 자연과학 같은 과학들의 내용을´ 그리고 ´피는 문학/예술적인 향기, 생동감 같은 것을´(12) 의미한다. 이 책의 연작인 <삶?죽음?운명>이 문학적인 피로 채워져 있다면, 이 책은 그 중에서 특히 뼈, 즉 논리적-철학적 토대에 중점을 두고 있다. 논리적-철학적 논의가 가지에 속한다면, 그 가지가 뿌리박고 있는 토대는 개념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념-뿌리〉라고 명명할 수 있을 텐데, 이 책에 제시된 개념-뿌리들은 세련되고 명료하게 다듬어져 있다. 또한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슬픔과 기쁨의 표정들, 홈런 타자가 만들어내는 환희의 순간들, 이런 생성(시뮬라크르)들로 가득 찬 일상(의 표면)의 용례들 속에서 그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논리적-철학적 논의는, 명료한 개념-뿌리들 위에서, 일상의 맥락과 연관되어 이루어지고 있기에, 딱딱함이라든가 지루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이 책의 모체라 할 『의미의 논리』(이정우 역)가 읽기에 굉장히 딱딱한 누룽지 같은 책이라(하지만 곱씹어 읽을수록 고소한) 한다면, 이 책은 그 누룽지를 푹 끊인 뜨끈한 숭늉이라 할 수 있다. 숭늉 한 대접에 세계가 열릴 수 있으랴마는,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여기 이 책은 하나의 세계가 희미하게 얼굴을 드러내는 특이점에 놓여 있다라고. 그 세계는 물론 철학의 세계이다. 좀더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세계, 개념적 사유가 극단화된 세계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극단적인 상상 운동이라 한다면, 철학은 극단적인 사유 운동이리라. 이 책은 그 극단적 사유 운동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대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펼쳐보아야 한다. 그 펼침은 분명 하나의 열림을 던져줄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열림과 함께, 가슴속에는 ´한 줄기 빛이 도래´하리라. 그 빛은 사유의 불을 지핌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을 비추는) 빛이며, 동시에 (삶을 사유하면서) 살아내게 하는 온기와 같은 것이다. 세계의 열림, 그것은 분명 우리 안에 잊지 못할 떨림과 울림을 자아낼 것이다.

by영풍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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