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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주의몫 |  | |
| 일찍이 푸코가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 바 있는바따유! 그는 국내에 <<에로티즘>>과 <<에로티즘의 역사>>, 그리고 <<문학과 악>> 등으로 번역된 책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의 말년에 쓰여졌다는 <<저주의 몫>> 그가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민했던 흔적 중의 가장 난해한 역작인 것 같다. 이 책에 나타난 중심 개념은 ˝소모˝라는 개념이다. 내가 읽은 바로는 그가 이 책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 소모, 낭비, 교환, 증여, 죽음 등인데, 이를 대표하는 단어가 바로 소모라는 것이다. 잉여물은 항상 남게 마련이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 속에 인간이 살고 있는 한 인간은 항상 어느정도의 잉여물 속에서 살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몇몇은 굶어 죽거나 할테니까 말이다. 인간은 이 잉여물을 소모(파괴, 증여 등등)할 수 있는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북미 인디언들에게서 볼 수 있는 포트라치(Potlatch)라는 증여의식이다. 문화인류학에 어느정도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음직한데, 마르셀 모스가 제대로 소개한 바 있다. 이 포트라치가 바로 바따유가 보는 소모 개념의 적절한 예가 된다. 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한 부족은 이웃부족에게 무상으로 자신의 선물을 증여하거나, 자신의 재산을 과감히 파괴한다. 이런 행사를 통해 각 부족은 자기들의 재력과 권력을 과시한다. 이런 사실은 곧 인간이 항상 잉여분의 가치를 한몸에 지니고 사는 존재란 점을 명백히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 내적 존재이기도 하다. 언제나 시간의 흐름, 즉 죽음을 의식하면서 사는 존재란 말이다. 이는 헤겔부터 시작하여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레비나스 같은 존재론자들이 이미 학적으로 체계화시켜 놓은 바라 새삼 말할 것이 못된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 내적 존재이기도 하면서 시간 외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영혼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은 때로 시간을 초월하여 자신과 세상을 굽어볼 줄도 아는 능력이 있음에 틀림없다. 죽음을 의식하면서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이 공포를 에로티즘 즉 성애(性愛)로 극복할 줄도 아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래서 변증법적인 동물임에 틀림없고, 자연과 어울리면서도 자연을 변화시키고 극복하기도 하는 문화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 문화적 존재인 인간이 <<저주의 몫>>에서는 잉여물의 질퍽거림 속에 허우적대지만 이를 소모나 증여를 통해 극복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모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따유가 보기에는 이 소모가 바로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다. 이는 과히 혁명적인 발상이라 할 만한데. 왜냐면 이제껏 철학이나 사회과학 등에서의 대체적인 사상적 주류가 생산이라는 것에 집중하여 논의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르크스식의 생산의 경제 개념이 한 세기를 지배해 왔다. 그런데 바따유는 이를 뒤집어엎은 것이 아닌가. 생산이 가능하려면 먼저 소모개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역겨움의 밑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한 바 있으며, ˝공동묘지가 채워지지 않았다면 젊은이들이 차지할 자리가 있을 것인가?˝라고 한 바 있다. 물론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라는 식의 논쟁거리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바따유가 존재의 상대론적 가치를 이미 터득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마르크스식의 생산과 바따유의 소모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by영풍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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