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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하모니카
할아버지의 하모니카


- 헬렌 그리피스 -



제1부

조지아의 뮤직


조지아 주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이 있었습니다. 철길 위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긴 열차가 사람과 짐을 싣고 오고갔습니다. 그리고 작은 집 한 채가 그 철길 옆에 있었습니다.
작은 집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왜 그 할아버지가 혼자 살고 있는지,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할아버지는 간단한 집안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오고가는 열차들을 바라보며 살아온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곤 했습니다.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그지없이 평온했습니다. 그렇게 기차가 오고가는 사이에 어느 덧 겨울은 끝이 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봄이 왔습니다. 얼어붙었던 땅이 녹기 시작하자, 할아버지는 창고 문을 활짝 열어 젖혔습니다. 그리고는 밀짚모자를 꺼내어 쓰고 괭이를 손에 들고는 집 근처의 밭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에는 상당히 넓은 야채 밭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밭에서 상추도 키우고 참외도 키우고, 또 콩도 길렀습니다. 밭을 일구는 할아버지의 이마에는 쉴 새 없이 땀방울이 맺혔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봄을 보내고 또 여름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해 여름의 일이었습니다. 볼티모어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의 딸이 조지아 행 열차를 타고 할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딸은 작은 소녀의 손을 붙잡고 함께 왔습니다. 할아버지의 손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소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이곳 조지아에서 이삼 일 동안 묵은 다음 볼티모어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어린 딸을 할아버지에게 맡겨둘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소녀는 더운 여름을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야 했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일거리가 늘었습니다. 어린 손녀딸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것쯤은 하나도 불편한 일이 아니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낯선 곳에서 할아버지와 한 집에서 단 둘이 지내게 되었지만, 그렇게 무섭지도 않았고 불편하지도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조지아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새싹이 자라나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는 야채 밭이 좋았습니다. 이제까지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흙의 냄새였습니다. 하루에 몇 번씩 볼티모어 행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갈 때마다 할아버지의 작은 집은 가볍게 흔들렸습니다. 소녀는 그런 집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낯선 곳에 온 까닭에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수줍음이 조금씩 없어지면서 소녀는 이제 할아버지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하는 동안, 소녀는 할아버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정신없이 따라다니다 실수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초록빛 새싹을 밟아버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소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창고에 들어가 무언가를 한참 찾던 할아버지가 낡은 밀짚모자와 작은 괭이를 들고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물건들을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소녀는 할아버지처럼 밀짚모자를 푹 눌러 썼습니다. 할아버지는 소녀를 밭으로 데리고 나가 잡초 뽑는 일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잡초를 뽑는다는 것이 때로는 멀쩡한 새싹을 뽑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잘 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소녀를 보고 할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네 덕분에 오늘 일은 잘 되고 있구나.˝
할아버지와 소녀는 밭이랑 사이사이를 오가면서 괭이질을 계속했습니다.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맺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덧 점심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앵무새 한 마리가 울타리 쪽으로 날아오더니 이 말뚝에서 저 말뚝으로 폴짝폴짝 옮겨다니면서 두 사람을 향해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개구쟁이!˝
할아버지가 앵무새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소녀도 할아버지를 따라 소리를 쳤습니다.
˝개구쟁이!˝
앵무새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나서 할아버지와 소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점심 시간이 되면 할아버지와 소녀는 나무 그늘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합니다. 소녀는 집에서 먹는 밥보다 이렇게 밖에 나와서 먹는 밥이 훨씬 맛있습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잔디 위에 누워 휴식을 즐깁니다. 할아버지와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낮잠을 즐기는 동안, 소녀는 모자를 베개삼아 누워 나무의 푸른 잎들과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봅니다.
주변은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소녀는 나뭇잎이 바람에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꿀벌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날개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여기저기서 귀뚜라미와 메뚜기가 튀어 다니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잘 들어두어라. 이게 바로 조지아의 소리란다.˝
소녀는 누운 채 할아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여름의 소리를 머리와 귀에 가득 담으면서 나무 그늘에서 깊이 잠이 들곤 했습니다. 조지아의 평온한 여름이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할아버지와 소녀는 낡은 차고 앞에 있는 평상에 나와 정겹게 마주앉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소녀를 위해 하모니카를 불어줍니다.
구슬픈 노래에서부터 신나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는 정말 모르는 노래가 없습니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하모니카 소리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하모니카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부릅니다. 할아버지의 하모니카와 소녀의 노래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됩니다.
할아버지가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밤이 되면 내가 왜 이렇게 하모니카를 부는지 알고 있니?˝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모르겠어요. 왜 그러시죠?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모니카를 부는 건, 귀뚜라미와 매미들 때문이란다. 낮에 우리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으니까, 그 보답을 하고 있는 셈이지.˝
할아버지가 계속해서 말합니다.
˝저 곤충들은 음악을 무척 좋아한단다.˝
소녀는 속으로 ´아! 그렇구나.´하고 생각합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여치와 청개구리, 그리고 쏙독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긴 잠에 빠져듭니다.
어느 날 밤에는 앵무새가 밤을 새워 울기도 합니다. 그 소리에 잠이 깬 소녀는 혼자서 살며시 미소지으며 조용히 속삭입니다.
˝개구쟁이!˝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마침내 9월이 되었습니다.
소녀가 볼티모어의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소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도 소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할아버지가 섭섭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소녀를 달래면서 말했습니다.
˝내년 여름이 되면 꼭 다시 이곳에 데려다 주마. 그러면 되지 않니?˝
소녀는 엄마의 약속을 받아들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내년 여름에 다시 보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습니다.


제2부

할아버지의 하모니카

그리고 이듬해 여름.
소녀의 엄마는 할아버지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현관 앞에는 온갖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고, 차고는 온통 찔레꽃으로 덮여 있었던 것입니다.
집으로 들어선 소녀와 엄마는 담요로 무릎을 덮고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병이 든 게 아니란다.˝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다만 너무 지쳐서 이런 거야.˝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했지만, 엄마와 소녀는 할아버지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기찻길 옆의 그 작은 집에 자물쇠를 채운 다음, 할아버지를 볼티모어로 모시고 갔습니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병이 할아버지의 말과는 달리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심각하지 않았다면 할아버지는 절대로 조지아의 그 작은 집을 내버려두고 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마음이 아팠지만 할아버지를 대할 때마다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병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할아버지도 볼티모어의 집을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넋을 잃은, 슬픈 표정을 지은 채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소녀의 슬픔도 점점 더 깊어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조지아의 작은 집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해 봄에 씨를 뿌리지 못한 야채 밭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할아버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도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은 이곳에 있지 않고 멀리 조지아에 가 있었습니다. 조지아에서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는데……. 소녀는 할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그리워졌습니다. 할아버지의 걱정이 깊어갈수록 소녀의 걱정도 깊어갔습니다.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짐 속에서 하모니카를 찾아내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할아버지의 하모니카였습니다. 하모니카를 보자 다시 작년 여름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소녀는 얼른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하모니카를 할아버지의 손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하모니카예요. 아무거나 불어주세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손위에 놓인 하모니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을 뿐,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소녀는 더 이상 슬픔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직접 하모니카를 불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손위에서 하모니카를 가만히 집어들고는 입술에 대고 불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의 일이었습니다. 소녀의 하모니카 소리를 듣던 할아버지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가 똑바로 소녀를 쳐다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볼티모어에 온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소녀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옛날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더욱더 열심히 하모니카를 불었습니다.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고 하는 데에 익숙해지자 소녀는 이제 노래를 불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불어보고 저렇게도 불어보았습니다. 마침내 짧은 노래를 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녀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때요? 할아버지, 마음에 드세요?˝
하지만 소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소녀의 하모니카 소리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그날부터 소녀는 하루종일 할아버지 옆에 앉아서 하모니카를 잘 불게 될 때까지 연습을 했습니다. 조지아에서 여름을 보내던 시절에 할아버지가 불어주었던 노래들을 하나하나 되풀이해서 연습한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소녀의 하모니카 실력은 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자신이 이제까지 알고 있던 노래가 아닌, 다른 노래를 불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노래는 이제까지 누군가가 먼저 지었던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소녀 스스로가 새롭게 만들고 있는 노래였습니다.
소녀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등으로는 따스한 햇볕을, 손으로는 괭이자루를 잡던 그 느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운 조지아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할아버지가 껄껄 하고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할아버지가 살며시 속삭이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개구쟁이!˝
그러자 소녀도 따라했습니다.
˝개구쟁이!˝
할아버지와 소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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