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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도동아일보신춘 당선작-굴뚝에서 나온 무지개(정리태)
노오란 초겨울 햇살이 외양간에 드러누운 누렁소 엉덩이 위에서 차츰 엷어지는 해질 무렵입니다. 곰보 지붕을 인 기와집 옆구리에 무뚝뚝하게 생긴 굴뚝 하나가 우뚝 서 있습니다. 웬일로 뒤란 대밭에 사는 굴뚝새가 포르르르 날아와 굴뚝 위에 앉았습니다. 오랜만에 찾아 든 손님이라서 굴뚝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안녕, 잘 있었니? 우리 일가새야.˝


˝아니, 일가라뇨? 내가 왜 아저씨네 일가지요?˝


˝일가고 말고. 너희 부모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던?˝


굴뚝새는 좁디좁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동박새가 우리 육촌이고, 콩새가 사돈의 팔촌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에이, 아저씨같이 움직일 줄도 모르고 날지도 못하는 굴뚝이 일가라는 말은 처음 듣네요.˝


˝이거 원….˝


굴뚝은 기가 차서 쯧쯧 혀를 찹니다. 굴뚝새는 굴뚝새대로 뭐가 억울한지 꽁지를 발딱 세웠습니다.


˝요즘 너희 부모들은 신세대 굴뚝새라더니, 다들 집안의 뿌리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너희들 이름이 왜 굴뚝새인지는 아니?˝


˝글쎄요. 다른 고운 이름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멋없는 아저씨네 이름을 갖다 붙였는지 그래 나도 궁금해요.˝


˝멋없는 이름이라구? 오래 살다 보니 별 소리를 다 듣는구나. 그것도 집안 고손자뻘 되는 새새끼한테서.˝


˝새새끼라 하지 말고 어린 새라고 불러 줘요.˝


굴뚝새가 연거푸 꽁지를 발딱발딱 세우며 동동거렸습니다. 어린 굴뚝새하고 입씨름을 벌이다 저도 모르게 달아오른 굴뚝도 긴 숨을 한 번 토해 냈습니다. 굴뚝은 모처럼 자기를 찾아와 준 이 손님이 토라져 날아가 버리면 어쩌나 싶기도 했습니다. 바르르 떠는 것을 보니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려 날개짓을 할 참이었습니다.


˝그래그래, 내가 지나쳤다. 미안하구나. 그 대신 내 얘기나 끝까지 들어 다오.˝


어린 새들은 옛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굴뚝새는 언제 삐죽거렸냐는 듯 두 발을 모으고 앉아 굴뚝을 바라봅니다. 굴뚝은 외양간으로 눈길을 돌려 누렁소 엉덩이에서 슬며시 물러나는 햇살을 바라봅니다. 한참 기억을 덥혀야 이야기가 흘러나올 모양입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아무 쓸모도 없이 뒤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신세지만 말이다. 아득한 너희 조상 새들이 날던 시절에는 나도 떵떵거리며 지냈던 몸이야.˝


˝떠엉떠엉거리며? 아저씨가요?˝


˝그 때는 무엇이 되었든 끓이거나 삶으려면 반드시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했거든. 세 끼 밥 짓고 국 끓일 때는 물론이고, 밤이면 군불이라는 것을 지펴서 온돌을 따뜻하게 달구어야 했으니까.˝


그 때는 그랬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마다 연기는 모락모락 굴뚝을 기어올라 하늘로 날아가곤 했습니다.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굴뚝은 온종일 연기를 흩뿌렸습니다.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굴뚝들이 서로 뿌연 연기 숨을 내쉴 때면 목이 칼칼해지는 고소한 냄새가 온 마을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행여 굴뚝이 숨을 잘 쉬어 주지 않을까 싶어 한결같이 조심스레 모시고 소중히 다루었습니다.


˝그 무렵 언제부턴가 싶구나. 유난스레 추위를 잘 타는 너희네가 나한테 와서 언 몸을 녹였다 가곤 했지. 아직 너희네는 마땅한 이름도 없을 때였다. 사람들은 굴뚝에 드나들며 복을 많이 받아 가는 새라고 해서 너희네를 `굴뚝새´라고 붙여 불렀지. 처음으로 이름을 갖게 된 너희 조상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니? 줄지어 굴뚝을 몇 바퀴씩 돌고, 참말 요란했다.˝


어느새 굴뚝새는 꽁지를 내리고 다소곳해졌습니다. 갈라진 굴뚝 벽돌 이음새에 가만가만 부리를 비벼 봅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앉았을 지도 모르는 바로 거기입니다. 그 틈새에는 용케도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말라 버린 며느리 밥풀잎이 들러붙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텔레비젼 안테나 버팀대 노릇도 못하는데요. 아저씨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요?˝


굴뚝새는 머뭇머뭇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물론이지. 그냥 비나 들치고 할 뿐이야.˝


˝굴뚝 아저씨를 다시 찾을 날이 올까요? 아저씨가 여기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닐까요?˝


˝결코 찾지 않겠지. 편한 맛을 보았거든. 저기 저 신기한 전기며, 가스며, 기름이며 좀 보렴. 다시는 날 올려다보지 않을게다.˝


굴뚝은 굴뚝새의 초롱한 눈망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굴뚝새의 눈망울에 반짝 물기가 어렸습니다.


˝편한 것은 그렇게도 좋은 것인가요?˝


˝저만 편하게 숨쉬려다가는 마침내 나무, 꽃, 강물, 그 아무도 숨쉬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르지. 편한 게 독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야 그런 것을 거들떠보기나 한다니?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려고만 안달인 걸.˝


˝굴뚝 아저씨가 사람들 일을 어떻게 다 알아요? 밤낮으로 여기만 서 있는데.˝


굴뚝새는 또 한번 바짝 대들어 봅니다. 굴뚝도 질세라 대뜸 목소리를 높입니다.


˝다 아는 수가 있다. 큰 키는 두었다가 무엇에 쓴다니? 아직 허리는 별로 안 굽었단다.˝


연기 숨을 멈춘 뒤부터 굴뚝은 새 길을 내다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아직도 동네에서 키가 큰 축에 속하는 굴뚝은 정자나무 아래로 난 새 길까지도 훤히 바라다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흙길이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생긋 웃음을 나누며 오가더구나. 그런데 길이 넓어지고, 까만 아스팔트를 발라 다진 뒤로는 통 밝은 낯을 못 봤어. 그저 쌩쌩 소리만 들리지. 뿐인줄 아니? 무너져라 우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하얀 구급차가 들이닥치고, 어휴, 여간 끔찍한 게 아니던 걸.˝


˝사람들은 그걸 `발전´이라고 말하던데요. `발전´이 중요하대요.˝


굴뚝새는 엊그제 감나무에 앉아 엿들은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날 동네 사람들은 벌건 이마에 굵은 줄을 그리며 `발전, 발전´이라는 낱말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된 마당에 발전이라…. 글쎄다.˝


외양간에서 누렁소가 `음매애´하고 울었습니다. 어느새 해는 멀리 땅 끝으로 주저앉고 누렁소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검붉은 노을이 머물러 있습니다. 굴뚝새는 날개를 접고 투박한 굴뚝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몸이 따뜻해졌습니다.


˝굴뚝 아저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해 보려무나. 어린 굴뚝새야.˝


˝오늘 제가 놀러 온 것은 말이죠.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에요.˝


˝마지막 인사? 너희네가 어디로 이사라도 갈 모양이구나.˝


굴뚝새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습니다.


˝네. 향교 대밭으로 갈려구요.˝


˝여기는 어때서? 지금 사는 대밭도 남향인데다 굼벵이도 많고, 또, 뭐냐, 외, 외양간 초가 지붕에서 놀기도 하니 썩 나무랄 데는 없어 보인다만….˝


굴뚝은 여느 때 같지 않게 말을 더듬었습니다. 더 보탤 말이 있을 법한데,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여기도 좋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만 사셔서 한가롭구요. 그런데요, 굴뚝 아저씨, 이 집이 헐린다는가봐요. 산너머 공단까지 가로질러 큰 도로를 낸 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터랑 대밭 위로 지나간다나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도….˝


굴뚝새가 기대어 있는 굴뚝 너머로 불그스름한 저녁놀이 물들어 내렸습니다. 굴뚝새는 굴뚝이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숨을 멈추고 가만히 날개를 떼어 냈습니다. 살금살금 굴뚝을 기어 내려와 담장 위에서 비로소 호르르 날았습니다. 한참을 날아오른 굴뚝새가 되돌아보니 굴뚝은 노을 속에 떠 있었습니다.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뱅뱅 돌고 있는 굴뚝 위에서는 무지개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 나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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