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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도새벗문학상-줄래아저씨(홍계숙)
1999년도 새벗문학상
줄래아저씨 홍계숙

빨랫줄아 빨래줄래?
마른 빨래 빨리 줄래?
빨래 열매 많이 줄래?

귀에 익던 그 노래가 다시금 들려 오는 듯해 줄래 아저씨가 감았던 눈을 힘없이 떴습니다. 먼 산이 구름 끝자락에 가려 희미하게 보입니다. 줄래 아저씨는 다시 눈을 감아 버립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조그마한 참새 한 마리가 줄래 아저씨의 선 졸음을 털어 냈습니다.
˝아,귀찮으니까 다른 데로 가 버려.˝
줄래 아저씨는 낯선 아기참새에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아기참새는 그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러자 미안해진 줄래 아저씨가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난 늙고 지쳤단다.그러니 조용히 내버려 두려무나.˝
줄래 아저씨는 먼 산을 힘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저, 아저씨는 누구세요? 옛날에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정말 모르겠니? 허허 이런. 우리 주인 아주머니는 참 부지런했어. 맞아. 오늘처럼 햇볕이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내 몸 가득히 뾰얀 빨래들을 널곤 했으니까.˝
˝아하! 빨랫줄이었군요.아저씨.˝
˝내 이름은 ´줄래´란다. 그렇게 불러 주렴.˝
˝줄래요? 아주 재밌는 이름이네요.˝
˝현수가 지어 준 이름이란다.˝
줄래 아저씨는 집안을 조용히 내려다 보면서 말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마당 저 편에서 현수의 발소리가 들릴 것 같았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이불 빨래를 널 때면 현수는 ,
˝엄마,동굴 같다. 하얀 동굴.˝
하며 벽처럼 버티고 선 빨래 속을 들락거리곤 했습니다. 현수는 일곱 살된 다른 또래에 비해 몸집은 좀 작았지만 다람쥐처럼 잘도 뛰어 다니는 개구쟁이였습니다.
˝현수는 오래 전에 떠난 주인집 아들이었지. 참 귀여웠어. 그래. 그때는 많이 빨래들이 내게 척척 걸쳐져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렸는데.....˝
현수 엄마는 마른 빨래를 걷을 때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잣말처럼 현수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현수야,엄마는 열매를 딴단다. 빨래 열매. 저기 감나무의 감을 아버지가 따듯이 엄마는 양말열매, 바지열매를 딴단다.˝
그러면 현수는 빨래를 걷는 엄마 곁을 늘 붙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빨랫줄아 빨래줄래?
마른 빨래 빨리줄래?
빨래 열매 많이 줄래?

꿈결처럼 그 노래가 새삼 줄래 아저씨의 마음을 적셔 왔습니다.
˝허허허.그래서 그 때부터 내 이름은 줄래가 되었단다.˝
˝그분들은 왜 떠났어요? 하긴 이렇게 한적한 시골에 누가 살려고 하겠어요. 다들 도시로 나가서 살려고 하는데...˝
˝그래서 사실,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이 집을 떠나고 싶어했어. 이런 시골은 살기 너무 불편해서 사람 살 만한 데가 못된다고. 그래도 현수는 여길 무척 사랑했어. 특히 나와 이 감나무를. 요 앞에 바로 보이는 저수지에서 물장난하다가 아주머니에게 야단도 참 많이 맞았는데.그 녀석. 후후후.˝
이 텅빈 집에서 다시는 귀여운 현수를 볼 수 없으련만, 줄래 아저씨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일만 아니었어도 현수는 오래오래 나와 같이 살았을지도 모르지.˝
˝무슨 일이 있었군요.?˝
˝그 날도 오늘처럼 무척이나 더운 한여름의 오후였지.˝

아주머니는 그늘이 짧게 드리워진 쪽마루 한쪽에 걸터앉아 방아찧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줄래 아저씨는 무슨 훈장처럼 온몸 가득히 갖가지 빨래들을 주렁주렁 걸치고 있었지요.
꽤 넓은 마당을 가로지르는 줄래 아저씨의 몸은 무척이나 길었습니다.
˝와! 줄래에 빨래 열매가 가득 열렸네! 내가 따야지˝
현수는 졸고 있는 엄마 쪽을 보면서 씨익 웃었습니다.
살금살금 까치발을 하며 그 앞을 지나 감나무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 현수야.안돼! 위험하단 말야!´
줄래 아저씨는 말리고 싶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감나무 가지 한쪽에 묶인 줄래 아저씨 쪽으로 현수가 한발 한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는 대롱대롱 매달린 빨래들을 향해 까딱까딱 손을 뻗었습니다. 줄래 아저씨는 조마조마하여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빨래 하나가 현수 손에 마악 닿을 때쯤이었습니다.
˝안 돼! 현수야.가만 있어!˝
어느 새 잠이 깬 아주머니가, 한손으로 감나무를 잡은 채 위험하게 손을 뻗고 있는 현수를 보고 소리쳤습니다.
갑작스런 큰 소리에 놀란 현수는 그만 감나무를 잡고 잇던 손을 놓고 말았습니다. 곧 이어 ´쿵´하고 나무 아래로 떨어진 현수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습니다.그 때가 생각난 듯 아저씨는 몸을 떨었습니다.
˝마침 밭에서 돌아오신 아저씨가 얼른 현수를 업고 읍내로 달려갔지.˝
˝현수가 죽었나요?˝
˝아니. 하지만 큰 병원에서 얼마동안 치료를 해야 했나봐. 그 일이 있은 후 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이 집을 떠나자고 졸랐지. 아저씨는 계속 농사지으며 여기 살고 싶어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지.˝
˝그랬군요.˝
˝이 집에서 이사 가던 날, 아저씨가 마지막이라며 아픈 현수를 데리고 왔지. 가기 싫다고
훌쩍대던 현수의 얼굴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단다. 아주머니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가 버렸어. 현수를 잘 키울 만큼 제대로 갖추어진 시설이 없는 이곳은 이제는 싫다는 말도 덧붙이고는 말이야.˝
˝그래서 그 후론 아저씨 혼자 이 집을 지켰나요?˝
˝그래. 그동안 여러차례 새로운 사람들이 이 집으로 이사 온 적은 있었지만, 살기 힘든 시골이라고 금방 떠나버리더구나.˝
˝그동안 참 많이 외로웠겠어요. 하지만 언젠간 현수가 돌아올지도 몰라요.˝
˝글쎄,그 때나 별 다름없는 이 시골로 다시 올 일이 있을까? ˝
줄래 아저씨는 몸을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말했습니다.
어느 새 따갑던 여름 해가 서쪽으로 꽤 많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까르르´ 웃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저씨,아이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혹시 현수가 아닐까요?˝
˝현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라. 혹 현수가 온다해도 이십년도 더 됐어. 벌써 어른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무슨....˝
줄래 아저씨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코방귀를 하늘 위로 ´쿠르르´날렸습니다.
˝아빠,이집이에요?˝
그건 아이의 소리가 분명했습니다. 줄래 아저씨는 낭랑한 아이의 말소리에 번쩍 눈을 떴습니다. 순간 현수가 뛰어오는 듯한 착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수는 분명 아니였습니다.
˝그래, 여기가 바로 옛날에 내가 살던 집이다. 그렇죠, 어머니?˝
비취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할머니와 함께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웬 남자가 흙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줄래 아저씨는 순간 너무 놀라 몸을 움쭉거렸습니다. 그 남자는 어른이 된 현수였기 때문입니다.할머니는 야윈 얼굴에 병색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현수의 엄마가 틀림없었습니다.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현수 엄마의 얼굴은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곳이 어머니 요양하기엔 딱 좋은 곳이예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 여기만한데 있나요?˝
어른이 된 현수가 말했습니다.
˝사람 살만 곳이 못된다고 생각해서 떠났는데.....사람 살자고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은 ....˝
할머니는 희미하게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어머니, 그때의 감나무가 그대로 있어요.묶어 놓은 빨랫줄도요. 얼마전까지도 누가 살았다던데...어쩜 이럴 수가 있죠? 집만 고치고 나머지는 우리가 쓰던 것을 그대로 두고 살았나 봐요.˝
현수는 놀랍다는 듯 감나무를 어루만졌습니다. 그 굵고 큰 손이 감나무 가지에서 옮겨 왔을 때 줄래 아저씨는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너희 아버지가 배추 심던 텃밭도 그냥 그대로 있고.집은 여러번 손을 본 모양이구나. 많이 바뀌었어. 그땐 부엌이 마루와 떨어져 이쪽이었는데... 그것만 빼면 꼭 이십오 년 전 그 때로 돌아간 것 같다.˝
할머니는 집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습니다.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여긴 그렇게 시간이 흘렸는데도 그대로라니 놀랍기만 해요.˝
˝그래 이곳이 외진 시골이라는 거지. 난 정말 그땐 이 곳이 지긋지긋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거 빼면 여긴 제대로 된 게 아무 것도 없었거든. 네가 그때 머리를 다친 것도 오죽했으면 빨랫감이나 가지고 놀다가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단다. 당장 이 곳을 떠나지 않고는 못견뎠었지.˝
갑자기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자 줄래 아저씨는 그 일이 제 탓인 것만 같아 슬그머니 딴 곳을 쳐다보았습니다.
˝어머니,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도시가 좋다고 떠나곤 하지만 아버지나 저는 여기가 좋았어요. 여기 감나무도,이 빨랫줄도,저기 짹짹거리는 참새도 모두 좋은 친구였는걸요.하나도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어요.오히려 도시에서 외로움을 느낀 적이 더 많았어요.˝
현수의 말에 축 늘어졌던 줄래 아저씨의 마음이 팽팽하게 당겨 옴을 느꼈습니다.옆에서 듣고 잇던 참새도 덩달아 줄래 아저씨 몸 위를 강중거렸습니다.
˝그래,그래.너희 아버지는 이 곳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오고 싶어하던 사람이 살아서 한번 오지 못하고, 여길 떠날 생각만 했던 나는 이렇게 병들어서 다시 찾게 되었구나.˝
할머니의 젖은 음성은 어느 새 가벼운 흐느낌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니,힘내세요.제가 직장을 잃긴 했지만 갈 데가 없어 이곳으로 오자고 한게 아니에요.이곳에서 제 삶을 다시 멋지게 시작해 볼거예요.어머니 병도 이곳에 있으면 많이 좋아질거라 믿고요.˝
의젓하게 커 버린 현수를 보자 줄래 아저씨는 오래도록 이 곳을 지키면서 지녔던 외로움과 힘겨움이 바람에 먼지 날리듯 한꺼번에 후르르 날아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 볕이 참 좋구나. 이런 날씨가 빨래 널기에 아주 좋은데....˝
할머니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늦은 오후의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한참을 서 있던 할머니는 현기증이 나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했습니다.
˝이 빨랫줄을 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기억나니? 빨래를 널면서 같이 노래 부르던 거? 후후...요 근처 좀 돌아보고 오마.˝
멀어져 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현수는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습니다. 손대면 쓸쓸함이 금방 묻어날 것 같은 할머니의 등진 모습에 줄래 아저씨도 다시금 그 때가 그리워졌습니다.
현수는 갑자기 가지고 온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양 손에 한아름 무언가를 안고 오더니 줄래 아저씨 몸 위에 척척 내걸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할머니의 하얀 삼베 치마와 저고리,버선,그리고 병원 이름이 새겨진 뾰얀 수건이었습니다.
때마침 불어 온 바람 한자락이 그 빨래들을 살랑 흔들고 지나갔습니다. 현수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도 시원하게 어루만지면서요.
마당으로 다시 들어서는 할머니의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할머니는 줄래 아저씨와 그 앞에 수줍게 서 있는 현수를 보자 놀란 눈을 하며 잠시 멈칫했니다.
˝어머니 ,줄래에 빨래 열매가 가득 열렸죠?함께 따볼까요?˝
할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가와 줄래 아저씨 몸에 걸려 있는 옷자락을 만져보았습니다.
할머니의 미소 띤 눈가에 주름잡힌 눈물이 맺혔습니다.
도르륵 눈물이 흙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아기참새야, 너도 줄래라고 부른 소릴 들었니?˝
줄래 아저씨도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아저씨를 웃겨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바람이 그 가느다란 몸을 간질이며 지나갔습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흰빨래들이 오래도록 넘실넘실 춤을 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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