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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북소리



이 슬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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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제법 무더웠다.
등허리의 옷자락이 몸에 척 달라붙는 느낌이 났다.
과수원 길을 지나면 바로 냇가이다.
철조망 너머 과수원에서는 초록빛 사과열매들이 저마다 햇살을 쬐느라고 야단들이다.
저렇게 하루하루 빛을 담아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발갛게 변하면서 맛있는 열매가 되리라.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계절은 참으로 묘한 데가 참 많다.
적당히 더웠다가 적당히 춥기도 하고......
냇가에는 헨젤과 그레텔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안내 표시인양 징검다리가 겅중겅중 놓여 있다.
나는 서너 군데 팔짝팔짝 건너다가 제자리에 섰다.
돌 틈을 뚫고 잔잔한 물 무늬를 만들며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그 물 속에는 하늘 높이 만큼이나 깊이 하늘이 잠겨 있다.
새파란 하늘에 한가하게 떠다니는 하얀 구름......
그대로 퐁당 뛰어들면 하늘 저 높은 곳까지 뛰어들 것만 같다.
나는 징검돌 위에 살그머니 쪼그리고 앉았다.
긴 머리칼 사이에 시커먼 얼굴이 나타났다.
싫다.
농촌의 아이들은 누구나 얼굴빛이 검었다.
햇살에 무방비 상태로 내놓고 다녀서 그렇다고 했다.
4학년 쯤 되면 사내아이들은 지게를 지고 꼴도 베고 겨울이면 나무도 한다. 여자 아이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밀가루 반죽해서 칼국수도 만들 줄 안다.
그러다 보니 언제 검어졌는지도 모르게 얼굴이 타 버린다.
나는 그 얼굴을 지우개로 지워버리기라도 하듯이 물을 움켰다.
물이 일그러졌다. 손끝에 닿은 물이 시원했다.
내친김에 세수라도 하려고 가방을 한쪽 옆에 내려두고 두 손으로 물을 움켰다.
둥, 둥, 둥, 둥......
칭, 칭, 칭, 칭, 칭......
나는 두 손에 움켰던 물을 힘없이 떨어뜨리고 발칵 일어났다.
그 소리는 곰바윗 골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굿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바람은 이럴 때 모른 척 해주면 좋으련만 쉼 없이 소리들을 실어 날라 왔다.
북 소리,징 소리에 실려 아련히 주문소리도 들려 왔다.
˝동해 용왕 용왕님네, 서해 용왕 용왕님네, 남해 용왕 용왕님네.......가련하고 불쌍한 우리 소원 들어주오......˝
어젯밤 엄마는 곽 할아버지네 작은 손자 병학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큰굿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개 작은 굿들은 집에서 하거나 당사자의 집으로 가서 하지만 큰굿은 곰바윗골로 가서 했다. 보통 큰굿은 한 번 시작했다하면 사흘 낮 사흘 밤을 계속했다.
˝엄마, 이제 그런 일 좀 안 하면 안 되나요?˝
나는 엄마가 굿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 학교에서 무당이니 굿이니 점쟁이들이 하는 일은 미신이라고 하는 것을 배우고 나면서 나는 웬일인지 엄마가 굿을 한다고 할 때마다 자꾸만 아슬아슬해 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일이 엉뚱하게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야가 무신 소릴 하고 있노?˝
˝그런 것은 미신이래요? 학교 선생님이 그랬어요.˝
˝학교 선생님이 공부는 안 가르치고 웬 엉뚱한 소리는 했을꼬?˝
˝그게 공부지 뭐 공부가 따로 있남.˝
˝허어......우리 같은 사람이 있어야 되는기라. 우리는 바로 사람과 신 중간에서 사람과 신을 연결시켜주는 사람인기라. 우리 같은 사람이 없으면 우예 되는지 아나?˝
˝그래도.......˝
˝야가 이대로 가다간 큰일 내겠구마. 학교도 초등학교만 하고 곧 바로 애기 무당 굿을 내려서 내가 데리고 다녀야 겠구마.˝
엄마는 가끔씩 내가 초등학교만 마치면 무당을 시키겠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 동네 사람들은 나만 지나가면,
˝헤이, 새끼 무당, 새끼 무당. 내가 언제 돈 많이 벌 수 있는지 알아 봐 주렴.˝
하고 놀려댄다.

난 우리 엄마가 무당이 된 것이 참 싫다.
하고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무당이 될 게 뭐람.
˝다 사람들이 필요해서 하고 있는기라.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노.˝
엄마의 기억으로는 아픈 사람은 바로 고쳐주고, 잘못된 사람은 잘 되게 해주었다는 것만 있었다.
만약에 잘못 된 사람이 있으면 그건 정성이 부족해 신이 노해서 그렇다고 했다.
˝곽 할아버지네 셋째 아들, 넷째 아들이 일제 때 차례로 억울하게 끌려가서 죽었어. 넷째는 전쟁 막바지에 필리핀에 끌려갔다가 일본이 항복을 하는 바람에 붙잡혀 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 처형되어 죽었어.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 이국만리에서 붙잡힌 것만도 억울한 일이거늘 전쟁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억울한 것이 어디 있노. 망할 놈은 일본 놈들이여. 전쟁은 우리가 일으켰나? 멀쩡하게 전쟁을 일으켜 왜 죄도 없는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그렇게 죽게 만들어. 셋째 아들은 또 어땠고? 일본의 어느 공사장에 붙잡혀 가서 비행장 닦다가 연합군의 폭격에 맞아 죽었다는 거여. 그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죽어서도 저승길에 못 가고 맴돌고 있는거여. 그래서 그 집 손자가 병이 들어 고생을 하는 거여. 그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 줘야 해.˝
곽 할아버지네 아들들이 억울하게 붙잡혀 가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곽 할아버지네 뿐만 아니다.
일제시대 때 붙잡혀 가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그 밖에도 참 많다. 엄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하필이면 그 집 아들들만 저승으로 못 찾아가고 그 집 근처에서 맴돌며 자기 조카인 병학이를 못살게 한단 말인가?
정말로 그런 혼이 있다면 이 집으로 올 게 아니다.
당연히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도 있다는 그네들 천황 머리통 속으로 들어 가든지, 그 자손들의 이마빡에 붙든지 해서 괴롭혀야 억울한 원수를 갚는 일일 것이다.

둥, 둥, 둥, 둥, 둥......
칭, 칭, 칭, 칭......
바람을 타고 북소리, 징 소리는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면서 계속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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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저게 무슨 소리니?˝
등뒤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만 듣고도 그가 교회에 새로 온 목사 아들 훈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필이면 이런 자리에 훈이가 나타날 게 뭐람.´
나는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저게 무슨 소리냐?˝
그는 한 번 더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훈이가 우리 마을로 온 것은 닷새 전이었다.
마을에 교회가 하나 새로 생겼다.
교회가 들어선다는 말은 재작년 봄부터였다.
˝뭐여? 서양 귀신이 들어 와? 어디 들어올 수 있나 보자.˝
엄마는 교회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교회를 못 들어오게 한다고 굿도 하고 그랬다.
그러나 엄마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공사는 곧 시작되었고, 2년만에 새빛 교회라는 이름으로 완성되었다.
˝지금까지는 서울에서 사립학교에 다녔습니다. 아버지께서 새빛 교회에 목사로 오시는 바람에 이리로 전학을 왔습니다. 시골 생활은 처음이라서 걱정입니다. 잘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오던 날부터 훈이는 우리 시골뜨기들을 완전히 기를 죽였다.
몸에 딱 어울리는 옷차림에다가, 눈처럼 하얀 피부, 유난히 까만 속눈섭,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창한 말솜씨......
˝점례라고 했니? 잘 부탁해.˝
내 옆에 자리가 비었다고 선생님은 훈이를 내 옆에 앉혀 주었다.
다들 내가 새끼 무당이라고 내 옆에 앉기 싫어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혼자 앉아 있었다.
˝목사의 아들과 무당의 딸. 잘 어울리겠다.˝
누군가가 이렇게 수근거렸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으나 훈이는 못 들었는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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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우리 저기 한 번 가보지 않을래? 저 골짜기가 곰바윗골이라고 했지?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넌 아니?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우리 같이 가보자.˝
나는 천천히 훈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훈이의 입에서 가자는 말을 안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가보자.˝
훈이는 내 곁을 지나 냇물을 건너더니 앞장을 섰다.
˝난 싫어.˝
˝왜? 안내 좀 해주면 안되니?˝
앞서 가던 훈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싫어.˝
나는 훈이와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칭, 칭, 칭, 칭, 칭......
챙, 챙, 챙, 챙......

소리들은 더욱 큰 소리로 나를 따라 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훈이와 가까워지려고 의도적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
특히 평소에는 나를 아주 무시하던 부잣집 영숙이는 자기 집에 있는 복숭아를 따다 준다, 작년 가을에 해둔 분이 뽀얗게 나는 곶감을 갖다 준다하며 가까워지려고 했다.
˝넌 참 좋겠다.˝
어떨 때는 부러운 듯이 어떨 때는 가시돋힌 듯한 말로 영숙이는 내 비위를 긁어 놓았다.
˝왜? 선생님께 부탁하여 너랑 앉혀 달라고 하지?˝
나는 마음속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건 정말 그랬다.
훈이가 온 후부터 훈이가 내 옆에 앉았다는 사실은 내가 학교 가는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정말로 그래도 되니? 그래. 훈이가 네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은 잘 안 어울려.˝
영숙이는 당장에라도 선생님에게 부탁할 듯이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이었을 뿐 실천은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할 용기도 용기였지만 그런 말을 한다고 선생님이 들어 주시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학교에 과일이며 과자 같은 것을 가지고 갔다. 비록 엄마가 굿을 하고 가져온 것이었지만.
´망할 자식, 알고 있으면서, 내가 곤란해하는 것을 보려고 일부러 곰바윗골로 가자고 해? 그래. 갈 테면 가보렴.´
나는 더 빨리 달렸다.
내 발끝에 차인 길섶에 있는 풀들이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휙휙 밀려갔다. 그들의 몸 휘청거리는 모습이 흡사 엄마가 굿하면서 뛰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지금쯤 훈이는 곰바윗골로 올라가다가 그런 모습을 보았으리라.
한 손으로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요령을 흔드는 엄마......거기에다 평소에 엄마와 짝이 되어 북을 쳐주는 타래실 아줌마, 흔들이 할머니가 쳐주는 북과 징 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주문을 외우는 그 모습을......
촛불은 대낮인데도 바윗돌을 거스르고 향내가 파르스름한 연기를 따라 흩어지고 있는 그 장면을......
어쩌면 훈이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나무 뒤에 숨어 서서 가만히 가만히 엿보고 있을 지도 몰라.
그러면서 뭐라고 흉을 보겠지.
그리고 나를 생각하고는 무당의 딸이라고 우스운 얼굴을 하겠지.
내 몸에 스치는 풀들이 더욱 빠른 속도로 일렁거렸다. 풀숲에 있던 청개구리들이 사방으로 뛰어 달아났다.
´싫어, 싫어, 싫어.......´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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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건 순전히 훈이 때문이었다.
˝이 세상이 언젠가는 불로 망한대.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어. 너희들 노아의 방주라는 말 들어 보았니? 그 때 하느님은 이 세상이 너무 어지럽고 범죄가 들끓는 것을 보고는 물로 심판을 내리신 거야. 그러나 이제는 다시는 물로 심판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지. 그 대신 불로 심판을 내려 이 세상을 바로 잡을 거래. 하느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준다고 했어. 용서를 해 주신다는 뜻이야.˝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훈이 곁으로 몰려들었다.
훈이는 시간나는 대로 자기 아버지에게 들었다면서 성경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이야기는 막히는 데가 없었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 이야기, 모세가 홍해를 건너는데 바다가 갈라진 기적이며 바벨탑 이야기 등......
나는 훈이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귓전으로 얼핏 들었다.
´절대로 듣지 않을 거야.´
언제나 아이들이 훈이 곁으로 모여 들 때면 나는 이런 생각부터 가졌다.
´그래. 엄마 말대로 훈이네는 서양귀신인지도 몰라. 흥. 거짓말.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구?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정말로 이 세상을 하느님이 창조해 냈다면 그는 참 잔인한 일이다. 이 세상을 정말 만들려면 착한 사람이나 만들고 말지 왜 악한 사람도 만들고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도 만드는가 말이다. 그리고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 왜 저 무서운 독사나 모기 같은 것도 만들어 냈을꼬? 사자나 호랑이는 왜? 흥? 바다가 갈라진다고? 말 같지 않은 말 하지 마라. 바다가 어떻게 갈라지나?´
그러나 내가 절대로 듣지 않겠다는 생각은 언제나 허물어졌다.
훈이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내 귀를 끌어당기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재미도 있었다.
´아니, 내가 안 듣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왜 이러지?´
나는 가끔 내 마음을 들킨 것처럼 혼자 얼굴을 붉히곤 했다.
훈이는 그 날 있었던 일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거리가 확 멀어진 것 같았지만 훈이는 전혀 그렇지 않게 대해 주었다.
˝교회 한 번 나올래? 재미있다.˝
´내가 왜 그런 델 가노.´
나는 겉으로는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마음이 자꾸만 그 쪽으로 끌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영숙이, 경자, 한순이, 옥련이 이런 아이들이 일요일이면 교회로 간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안달이 났다.
´계집애들, 밥하고 빨래는 언제 하고 그런데 다닐 여유가 있노.´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꽤 여러 번이었다.
동네에서 무섭기로 소문이 난 옥련이 아버지가,
˝교횐지 뭔지 바쁜 아이들을 끌어 들여 가지고 일요일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고 당장이라도 교회를 부셔버릴 듯이 식식거리고 갔다가 얌전하게 물러 왔단다.
훈이 아버지에게 뭐라고 설득을 당했는지 옥련이 아버지는 그 뒤로 교회에 아이들을 내 보내야 한다고 앞장서서 뛰어다녔다.
엄마가 무당이면서 교회를 서양귀신이 붙었다고 욕만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언젠가 한 번은 훈이 아버지가 집으로 온 적이 있었다.
˝주를 믿으십시오. 하느님은 회개하고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전부 그 넓은 가슴으로 따뜻이 맞이해 줄 것입니다.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어림도 없었다.
˝퉤, 퉤, 퉤......물러가라. 서양귀신아. 훠이, 물러가라......˝
엄마는 그를 향하여 침을 뱉으며 요령을 흔들어 댔다.
다른 때도 섬뜩해 보였던 눈썹은 치켜올려 더욱 매서워 보였고, 눈에서는 살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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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이 제법 선선히 부는 일요일이었다.
뜰 깊숙하게 들어 온 햇살은 순전히 황금빛이었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 뒷뜰에 일렁거리고 있는 아람이 번 밤송이, 뜰 저 멀리로 보이는 들판, 길옆에 아우성처럼 다투어 피어있는 코스모스꽃송이들......
햇살을 받은 것들은 모두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아이고 허리야, 요즈음에는 일도 잘 없고......˝
엄마는 방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더니 자리에 누웠다. 이내 가볍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심심했다.
뎅, 뎅, 뎅......
교회 종소리가 울렸다.
´쳇.......´
종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새 삽작문을 빠져 나와 들판 길을 걷고 있었다.
˝헤이, 새끼 무당, 우리 아들 장가갈 수 있게 굿이나 한 번 해 주고 가지.˝
빨랫터에서 만난 얌전이 엄마가 아는 체 했다. 옆에서 빨래를 두드리던 동네 아줌마들이 까르르 웃어댔다.
교회 마당은 조용했다.
발자국 소리에도 크게 놀랄 정도로 아주 조용했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서 뒷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쥐죽은듯이 앉아 있고, 훈이 아버지가 앞에서 뭐라고 가만가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제일 첫날 이 세상을 밝히는 빛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불을 만들었지요, 그 다음에는 물도 있어야 하겠기에 물을 만들고 나무를 만들었고......그리고는 사람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어떻게 만드는 것이 좋을지 모델이 있어야지요. 하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으로 가장 첫 번 째 인간 아담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아니, 너 여기 웬일이니?˝
˝에구머니나.˝
나는 등뒤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후다닥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훈이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 부끄러웠다.
순간 훈이가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들어 와. 괜찮아.˝
훈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몰래 들여다보다가 들킨 죄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훈이가 이끄는 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날 저녁 나는 엄마에게 밤늦도록 부채로 얻어맞았다.
˝앞으로 큰무당이 되어 신장님을 받들어야 할 년이 서양 귀신이 있는 교회에 제 발로 찾아들어 가다니, 장차 우리 신장님의 노여움을 어찌하려고......훠이, 귀신아, 물러 가라, 물러 가......서양 귀신아, 물러 가......˝
나는 그 뒤로 훈이를 한참 동안 볼 수가 없었다. 엄마가 학교에도 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를 엄마가 굿하는 방에 가두어 놓고 밖으로 못나오게 했다.
˝우리 애는 지금 귀신에 씌여서 당분간 밖으로 내 보낼 수 없답디요.˝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쓴답디까?˝
선생님이 마을 뒷산 어귀에 있는 외딴집으로 찾아 왔을 때에도 엄마는 방안에서 방문만 열고 이렇게 말했을 뿐 나와 보지도 않았다.
˝누구나 제대로 사람구실을 하자면 배워야 하지요. 왜 멀쩡한 사람을 까막눈으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학교에 보내니까 쓸 데 없는 것만 가르쳐 놓았더군. 우리 같은 사람을 보고 미신이라고 하지를 않나......굿하는 무당은 모두 웬수대하 듯 보지를 않나.....˝
엄마의 생각에는 그 어느 누구의 생각도 뚫고 들어 올 수 있는 바늘 구멍 만한 틈도 없었다.
선생님도 그렇게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나에게 무당을 배우라고 했다. 북채 잡는 법에서 요령 흔드는 법, 주문 외는 법, 칼을 휘두르면서 몸 놀리는 법......
그러나 나는 엄마의 그 억센 손아귀에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머리채를 끌어 잡히면서도 엄마의 가르침을 따라 하지 않았다.
˝말들어, 말들어. 넌 해야 해. 해야 해.˝
엄마는 타이르다가 윽박지르다가 달래다가 때로는 몽둥이로 두들기면서까지 갖은 수단으로 나를 가르치려고 했다.
˝난 이담에 내 자식에게는 무당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려주지 않을래요. 내가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얼마나 놀림을 당하고 있는지 아세요?˝
˝그러니까 학교에 가지 말란 말이여.˝
˝언제까지나 이런 모습으로 살수는 없어요. 난 무당이 되지 않을래요.˝
이렇게 버티면서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훈이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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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가 아이들과 산에 올라갔다가 크게 다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마을보다 조금 일찍 찾아 온 산허리에 낀 얼음을 밟았다고 했다.
그래서 미끄러졌는데 낭떠러지에 떨어졌다고 했다. 그나마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것은 낭떠러지 끝에 있던 소나무에 걸렸다가 떨어진 덕택이라고 했다.
˝거 봐라.서양 귀신이 들어 와서 마을을 어지럽혀 놓으니까 곰바윗골 우리 신장님이 노한 것이여. 거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놓아?˝
엄마는 눈섭을 치켜 뜨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우, 맙소사.´
그 날 저녁에 나는 엄마의 눈을 피해 마을로 내려갔다.
˝영숙아, 훈이 어떻게 되었대?˝
˝곰바윗골 뒷산에 올라가다가 바위에서 미끌어졌대.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대.˝
영숙이도 그 말을 하면서 울먹거렸다.
˝얼마나 다쳤길래?˝
˝목이 부러지고, 심장에 충격을 받았대. 그리고......˝
나는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올라 왔다.
사흘 째 되는 날까지도 훈이는 마찬가지로 그 상태라고 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밤 세워 기도를 한다고 했다.
˝오우, 맙소사.˝
해가 기울고 서산 머리에는 발간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진 주황빛 노을은 구름이 움직이는 대로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림에서처럼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발간 불꽃이 뭉클뭉클 솟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노을이 사라지고 땅거미가 지는가 했더니 어느 새 산골 마을에는 둥그런 달이 솟아올랐다.
겨울을 문턱에 두고 있을 때여서인가?
말간 하늘에 둥드렷이 뜬 달은 매섭도록 차 보였다.
달 주변에 구름 한 자락이 모여들고 있었다.
역시 자연은 아름답다.
신비스러웠다.
둥그런 달 속에 훈이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손을 쭉 뻗치면 구름 한 자락이 빠른 속도로 내려 와 자기 자신을 태우고 올라가 줄 것 같다.
그러면 훈이는 달 속에 있다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끌어 올려 주지 않을 까.
가슴이 벅차 올랐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도저히 그냥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엄마가 굿할 때 쓰던 물건들이 방안 구석구석에 놓여 있었다.
나는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선반 위에 놓여 있는 북을 꺼내 방바닥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둥, 둥, 두둥, 둥......
두둥, 두둥, 둥, 둥, 둥.......

나는 북을 때리기 시작했다.
북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문소리가 나면서 누군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려. 그려. 그렇게 하는 거여.......˝
엄마였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엄마가 주문을 외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훈이가 빨리 완쾌 되게 해 주소서.빨리 완쾌되게 해 주소서......´

둥, 둥, 둥, 둥.......
내 손놀림은 더욱 더 빨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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