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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9년강원일보신춘문예당선작-봄눈(김개영) |  | |
| 구름과 함께 유유히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야. 아버지가 희고 가벼운 새털구름을 내게 약간 떼어 주셨어.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구름을 몰게 된 거야. 나는 그 동안 기껏해야 꽃씨를 날려 주거나 낙엽을 쓸어 내는 일밖에 못했거든.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엄청난 구름 떼들을 거느리고 이곳 저곳에 눈과 비를 뿌려 주곤 하시는 거야. 저 남쪽 어딘 가에는 태풍이라는 힘센 아저씨가 계셔서 가끔 우리 식구와 만나기도 했지. 그럴 때마다 나도 얼른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어. 태풍 아저씨처럼 힘 자랑도 하고 싶고 지상에 눈과 비를 뿌려 주면서 푸른 생명들을 키우고도 싶었던 거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름은 눈구름이야. 눈꽃 요정들이 만들어 준 하얗고 포근한 함박눈을 가득 품고 있는 구름 말이야. 나는 종종 눈꽃 요정들을 만나러 눈구름을 찾아가지. 눈꽃 요정들은 눈처럼 하얀 마음과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 또래의 바람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그렇게 착한 마음으로만 만든 눈은 세상을 아름답고 맑게 해주고 잠시나마 인간들의 마음도 착하게 해준다고 언젠가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 하지만 눈구름을 몰려면 나는 좀더 커야 한다지 뭐야. 눈구름은 아주 클뿐더러 눈은 아무 곳이나 함부로 뿌려 주지 않는다는 거야. 눈은 축복 받는 곳에만 뿌리는 우리 바람들의 선물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거든.
눈구름은 몰지 못하지만 그나마 가벼운 새털구름이라도 몰고 가는 나를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견스러워하는 눈치였어.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이제 나도 어엿한 구름몰이가 된 거야.
나는 봄이 시작되고 있다는 남쪽의 풍경이 보고 싶었어. 마침 나와 가장 친한 어느 눈꽃 요정의 부탁을 들어줄 겸 그곳으로 가기로 한 거야. 그래서 한참 황량한 겨울 들판을 내려다보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지. 청량한 하늘 위를 나는 도요새의 긴 날개짓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어.
한나절을 신나게 달렸나 봐. 그런데 나는 말로만 들었던 도시를 보게 된 거야. 그러자 눈꽃 요정과의 약속이 떠올랐어. 남쪽으로 가다 보면 하트 모양으로 생긴 아주 큰 도시가 있다고 말이야. 그 가운데에는 넓고 긴 강이 흐르고 있고 누에고치처럼 생긴 제법 큰산이 자리잡고 있다고 했지. 과연 자세히 살펴보니 그대로지 뭐야. 그 눈꽃 요정은 영호라는 아이의 소식을 알려다 줄 수 없겠느냐고 며칠 전부터 부탁해 왔어. 자신이 직접 가야 하지만 이미 그 곳은 봄이 시작되고 있어서 갈 수 없다는 거야. 눈꽃 요정은 눈 내리는 날에만 지상에 내려갈 수 있거든.
잠시 구름 떼들을 산봉우리에 걸쳐두고 나는 도시 가까이 내려왔어.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 울긋불긋한 간판과 상점들. 거리마다 꽉꽉 들어찬 사람들과 자동차들. 그리고 왜 이리 도시에는 높고 단단하고 커다란 건물이 많은지. 빌딩과 빌딩 사이를 지나며 부딪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모든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씀해 주시던 것, 그대로였어. 복잡하고 화려하고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아버지가 그러셨어. 도시는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고. 구름 떼들이 더러워진다고 말야. 하긴 아까부터 심한 냄새가 코에서 진동하고 있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고 있었어. 먼지가 자욱하고 멀리 커다란 굴뚝 위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계속해서 솟아오르고 있었어. 산 위에 구름 떼들을 올려다보니 콜록콜록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었어.
더 이상 보는 것도 실증이 난 나는 아픈 머리를 짚으며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어. 그 누에고치처럼 생긴 산과 북쪽으로 마주 보고 있는 산비탈에 영호가 산다고 했어. 숲이 시작될 즈음. 약수터가 하나 있는데, 영호가 거기 있을 거래. 아까 산을 내려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판잣집들이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어.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살고 잇다니, 도시는 화려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
그런데 막 숲이 시작되고 있는 곳에서 한 아이를 보게 됐어. 허름한 옷을 입은 그 아이는 약수터에서 나뭇가지를 짚고서 고여 있는 약수를 마냥 쳐다보고 있었어. 얼굴을 자세히 보니 병색이 짙고 무척 야위어 보였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막대기 하나에 온몸을 기대고 있었지. 저 아이가 영호 아닐까?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 초롱한 눈망울에 슬픔이 가득 고여 있었거든. 나는 그 아이의 머릿속으로 살며시 들어가기로 했어. 우리 바람들은 소리 없이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거든.
귓속의 깜깜한 통로를 지나서 나는 아이의 눈으로 밖을 보았지. 함초롬이 고인 물 위에는 어느 새 저녁 달님이 눈동자처럼 빛나고 있었어. 어디선가 낙엽이 날아와 떨어졌어. 긴 물결이 지나자 환한 미소를 띤 소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일고 있는 거야. 어! 자세히 보니, 그 모습은 내게 영호의 소식을 알려다 달라고 부탁했던 눈꽃 요정이었어. 너무 궁금해졌지. 이 아이와 그 눈꽃 요정과는 어떤 사이일까? 이내 밖이 흐려지고 있었어. 아이가 약수를 나뭇가지로 애서 휘젓고 있었고 아이의 눈에는 또 눈물이 차 오르고 있었던 거야.
˝영호야!˝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에 아이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돌렸지. 역시 이 아이는 눈꽃 요정이 말하던 영호였던 거야. 영호를 부르는 소리에 나도 놀라서 얼른 밖으로 나와 버렸어. 아이의 아버지였나 봐.
˝또 병원에 입원하고 싶어서 그러니? 차가운 공기를 쐬면 낫는 병도 도로 도진단 말이야. 자 막대기 버리고 아버지 등에 업히렴.˝
그 아버지는 영호를 등에 업고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어. 그런데 영호의 아버지는 뒤뚱뒤뚱 보기에도 위태로울 정도로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거야. 다리가 무척 불편하게 보였어. 나도 살며시 따라갔지. 그런데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아까 그 보기 흉했던 판잣집 중 하나였던 거야.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을 볼 수가 없었지만 나는 영호라는 아이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혼자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영호, 영호가 마음속으로 얼굴을 그리던 그 환한 미소의 눈꽃 요정, 그리고 이내 그렁거리던 눈물. 무슨 슬픈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어.
막 껌껌해져 오는 것이 무섭기는 했지만 하늘로 올라가 우리 바람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달님에게 영호와 그 눈꽃 요정의 얘기를 해달라고 졸라댔지. 달님은 이런 얘기를 해주셨어.
그 소녀, 그러니까 그 눈꽃 요정은 영호의 동생이었던 거야. 석 달 전, 첫눈이 내리던 날에 하늘 나라로 간……. 영호는 눈꽃 요정의 다정한 오빠였었지. 지상에 인간으로 있을 때, 그 눈꽃 요정의 이름은 은미였구. 영호는 백혈병을 오래 전부터 앓고 있었다는 거야. 허약한 영호를 지켜주려고 늘 은미가 따라다녔지. 영호는 언제 갑자기 쓰러질지 몰랐거든.
그래서 은미는 오빠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교 정문 앞에서 하루 내내 오빠를 기다리곤 했었지. 학교 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은미는 학교에 가지 못했어. 왜냐하면 영호네 집은 많이 가난했기 때문이지. 어머니는 오래 전에 집을 나갔고 아까도 보았지만 아버지는 한쪽다리가 불편하신 분이었던 거야.
학교가 끝나면 은미는 오빠와 손을 잡고 비탈진 달동네를 오르곤 했어. 그리고 자주 뒷산 약수터까지 올라갔지. 그럴 때면 영호는 검은 비닐 봉투를 꺼내 놓는 거야. 맛있게 보이는 샌드위치 몇 조각이었지. 가난한 영호는 점심을 싸 갈 수가 없었던 거야. 언젠가 점심 시간이면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영호를 선생님이 보게 되었지. 선생님은 늘 영호에게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싸다 주셨고 영호는 그 중 반은 아껴 두었다가 뒷산 약수터에서 동생과 나눠 먹었지.
막 겨울이 시작되고 있을 즈음이었지. 그 날도 은미는 학교 교문 앞에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어. 송이송이 흰 눈을 맞으면서 말이야. 은미는 아까부터 유심히 문방구 앞에 진열되어진 갖가지 색깔의 사탕을 보고 있었지. 너무나 먹음직스러웠던 거야. 은미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사탕을 한 움큼 쥐고 말았지. 순간 은미는 도둑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난 거야. 사탕을 놓고 손을 떼려는 순간 주인이 가게에서 나와 소리치며 은미를 붙잡았던 거야.
˝이, 도둑년! 어디다가 더러운 손을 대는 거야.˝
환한 한낮의 거리에서 은미는 팔 한쪽을 잡힌 채로 주인의 매를 마구 맞고 있었어. 은미는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주인은 막무가내였어. 그 때, 마침 영호가 교문을 나오고 있었지. 영호가 은미를 보고 막 달려가려다가 돌부리에 채어 넘어지고 말았어. 그 때 은미는 얼핏 오빠의 모습을 보게 되었지. ´오빠가 또 쓰러진 건 아닐까?´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은미는 주인의 팔을 뿌리치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거야. 그런데 마침 좁은 도로를 난폭하게 지나던 자동차에 그만…….
˝휘이윙…….˝
나는 달님의 얘기를 듣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 주위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같이 들었던 별님들도 초롱초롱 눈을 빛내면서 흐느끼고 있었지. 은미를 보낸 영호와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렸을까? 더구나 영호의 병은 은미가 하늘 나라로 간 뒤에 더 심해졌다지 뭐야. 나는 당장 하늘나라로 가서 하느님께 따지고 싶었어. 그렇게 착하고 예쁜 은미를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간 이유를 말야.
˝달님, 달님은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알고 계시죠?˝
˝하늘 나라?˝
˝달님은 우리 바람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시잖아요. 하는 나라로 가는 길도 달님은 분명 알고 계실 거예요!˝
˝가서 무얼 하려구!˝
˝하느님께 묻고 싶어요. 왜 어린 은미를 데려갔는지를요.˝
˝그건 은미가 천사같이 예쁘고 착했기 때문이야. 하느님이 더 중히 쓰시려구 말야. 은미는 하늘 나라에서 눈꽃 요정이 되었잖니?˝
˝은미는 왜 눈꽃 요정이 되었죠?˝
˝눈이 내리던 날 하는 나라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지.˝
˝그럼 제가 영호를 도울 방법은 없나요?˝
˝글쎄……. 저 아래 영호를 보렴. 크레파스로 무언가 그리고 있구나.˝
˝집과 나무와 새와 꽃과 나비, 그 위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어요.˝
달님이 환하게 비춰 주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작은 창이 보였고 영호는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거야.
˝저런 또, 동생 생각에 저러는구나. 아이 불쌍해라. 눈이라도 내리면 은미가 와서 영호를 보살펴줄 수 있을 텐데…….˝
눈? 나에게 퍼뜩 좋은 생각이 난 거야. 바로 눈구름을 생각해 낸 거야. 나는 북쪽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달려가기로 했어.
˝제가 눈꽃 요정들을 데리고 올게요.˝
˝바람아저씨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저희 아버지는 제 말을 들어주실 거예요.˝
˝그래, 그럼 어서 다녀오려무나. 내가 길을 밝혀줄 테니까.˝
나는 달님이 비추어 주는 빛을 따라 새털구름들을 몰고 북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지. 이래뵈도 내 달리기 실력은 제트기 정도는 된다니까!
북쪽 하늘에 도착하자 아버지가 왜 이리 늦었냐고 야단을 치셨지. 어머니도 걱정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나는 영호와 그 눈꽃 요정의 얘기를 말씀드렸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지.
˝아버지, 저 남쪽 하늘에 눈구름을 몰고 갈 수는 없나요?˝
˝우리 막둥이의 마음씨가 참 곱구나. 그런데 말이다. 이제 그 쪽은 봄이 시작된단다. 마침 내일 그쪽으로 비구름을 몰고 가려던 참이었단다.˝
˝하지만, 아버지. 그쪽에는 첫눈을 뿌린 이후에는 겨울 내내 눈구름을 보내지 않았잖아요.˝
˝첫눈이 내리던 날, 너도 기억나지 않니? 도시 사람들은 눈 내리는 것을 반겨 하지 않았단다. 차가 막힌다느니, 눈이 녹으면 거리가 지저분해진다느니, 더 이상 옛날처럼 눈사람을 만들지도 않고 눈을 함뿍 먹어 보지도 않고 눈싸움을 하며 눈 놀이도 하지 않는단다. 그런 곳에 하늘 나라의 눈꽃 요정들이 만들어 준 우리 소중한 함박눈을 펴 줄 수는 없단다. 그래서 우리 바람 아저씨들은 그쪽에 눈구름을 보내지 않기로 했단다.˝
˝하지만 아버지, 도시에도 영호같은 착한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잖아요. 눈을 보면 인간들이 잠시나마 마음이 착해진다구요. 네? 아버지, 영호와 은미가 서로 만나게 해주세요. 아버지이이…….˝
˝그래, 그래, 내가 졌다. 엄마랑 함께 눈구름을 몰고 도시로 가자꾸나.˝
˝와아, 신난다. 저는 커서 아빠처럼 훌륭한 구름몰이가 될 거예요.˝
˝하하하, 그 녀석.˝
그래서 밤새 함박눈이 펑펑 내리게 됐지 아침이 찾아오자 도시는 하얀 눈 세상이 되었어. 마치 구름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어. 짜증을 내며 눈 내리는 것을 싫어한다던 도시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때늦은 눈을 반기고 있었어. 하늘에서는 눈꽃 요정들이 서로들 재잘거리며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지. 나는 영호네 집 창문을 기웃거리며 영호의 환한 미소를 기다렸었지. 그리고 영롱한 아침 이슬처럼 내려올 눈꽃 요정, 은미를 기다린 거야.
스케치북 위에 어지럽게 크레파스들이 널려진 채로 영호는 아직도 엎드려서 자고 있었어. 하얀 볼에는 눈물 자국이 그대로 말라 있었지.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띠면서 말야.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려도 영호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 점점 초조해졌어. 눈이 그치면 안될 텐데……. 그런데 뒤에서 내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어. 뒤를 보니 온통 흰빛으로 빛나는 영호와 은미가 환하게 웃고 있었어. 영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병색이 돌지도 않았고 슬픈 눈망울도 사라져 있었지.
그제야 알게 됐지. 영호도 하늘 나라 사람이 된 거야. 그들은 사랑스러운 오누이 눈꽃 요정으로 빛나고 있었던 거야. 이제 그들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게 되었어. 영원히 세상 사람들에게 맑고 포근하고 아름다운 눈을 만들어 주는 거야. 하늘의 축복을 대신해서 말이야.
나는 어느새 기쁨에 찬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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