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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박경태)
깊은 산골 외딴 마을에 말더듬이 달호가 살았습니다. 달호는 답답할 정도로 말이 어눌하고 엉뚱해서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호는 집안에 거들 일이 없으면 늘 혼자 개울둑에 앉아 돌팔매를 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다 심심하면 삘기도 뽑아먹고, 물고기도 잡고, 백양나무 아래에 누워 구름을 세다가 낮잠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산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달호는 여느 때처럼 개울둑에 혼자 앉아 보리피리를 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햇살에 반짝이는 시냇물을 내려다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입니다. 멀리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산모롱이에 꽃무늬 양산을 함께 쓴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아줌마고, 다른 한 사람은 여자아이입니다. 아줌마는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는 머리를 두 갈래로 곱게 따고 노란 원피스를 입었습니다. 옷차림만 봐도 도시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달호는 사뿐사뿐 걸어오는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갑자기 눈이 부셨습니다. 아지랑이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햇살에 반짝이는 시냇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탓일까요? 잠시 헛 것을 본 듯한 착각도 들었습니다.
갈래머리 여자아이는 분명히 처음 본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처럼 낯이 익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갈래머리가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달호는 꼭 어디론가 숨거나 달아나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달호는 보리피리를 질근질근 씹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달호가 자리를 피하려고 허겁지겁 엉덩이를 털고 일어설 때였습니다. 뒷덜미에서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얘, 잠깐만!˝
달호는 못들은 척하고 종종걸음쳤습니다. 아줌마가 한 번 더 불렀지만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돌아볼 수 없었습니다.
개울을 따라 곧장 마을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을에 다다랐을 즈음에야 달호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아줌마는 갈래머리를 등에 업고 징검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달호네 마을이 아닌 이웃마을 사릿골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달호는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 올려서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가슴이 자꾸 뛰면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꼭 뭐에 홀린 기분 같았습니다.
달호는 우물가에 앉아서 한 동안 숨고르기를 했습니다. 자기 엄마 등에 업혀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갈래머리의 모습이 자꾸 가물거리며 떠올랐습니다.
달호가 갈래머리를 다시 만난 것은 며칠 뒤 처음 만났던 바로 그 개울가에서였습니다. 아직 누렁이에게 먹일만한 풀이 자란 것도 아닌데 달호는 학교만 끝나면 누렁이를 개울가로 끌고 나가 백양나무에 메어놓고 팔을 궤고 누워 있는 날이 잦았습니다. 그래야 놀고먹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하루는 달호가 이 생각 저 생각을 구름에 띄우다가 설핏 잠이 들었습니다. 달호는 누군가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잠이 깼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갈래머리가 내는 콧노래소리였습니다. 갈래머리는 언제 왔는지 개울 건너편에서 토끼풀을 헤집으며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달호는 혹시라도 갈래머리와 눈이 마주칠까 봐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얼른 숨고 싶었습니다. 만약 갈래머리와 달호 사이에 개울이 흐르지 않았다면 달호는 벌써 자기 마을로 달아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징검다리가 놓여 있긴 했지만 갈래머리와 달호 사이에 놓인 조그만 개울은 달호의 수줍은 마음을 감추어 주기에 적당한 거리였습니다.
달호는 하는 일없이 멀뚱멀뚱 앉아있기 뭐해서 갈래머리처럼 토끼풀을 헤집으며 뭔가를 찾는 척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따금 개울 건너편을 몰래 훔쳐보고는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갈래머리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순간 달호는 보았습니다. 꽃처럼 방실방실 웃는 갈래머리의 예쁜 얼굴을…….
달호는 오줌을 누다가 들킨 아이처럼 달아나듯 급히 소를 끌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물씬 나는 것 같았습니다. 달호는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날아가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몸이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도 달호는 갈래머리랑 개울을 사이에 두고 우연처럼 가끔 만났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서로 말을 건네지는 않았습니다. 갈래머리는 달호와 눈이 마주치면 웃음을 띄워 보냈습니다. 하지만 달호는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그래도 전처럼 수줍어서 달아나지는 않았습니다.
달호는 가끔 스스로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갈래머리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는지, 왜 수줍어해야 하는지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갈래머리가 때도 없이 자꾸 생각이 났습니다.
사흘 째 비가 오락가락 내렸습니다.
어떤 때는 봄비답지 않게 장대비가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달호는 비가 오는 날은 개울가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비가 그치고 볕이라도 날라치면 부리나케 개울가로 달려가고는 했습니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꾸 갈래머리가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갈래머리는 볼 수 없었습니다.
괜스레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아니면 비가 오는 날 훌쩍 떠나버린 것은 아닌지, 꼭 갈래머리를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끼풀에 하얗게 꽃이 피었습니다. 갈래머리는 토끼풀이 우거진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을까요?
달호는 토끼풀꽃을 뜯어 반지랑 팔찌를 만들었습니다. 서로 꽃대를 엇갈리게 촘촘히 엮어 예쁜 꽃목걸이도 만들었습니다.
해 질 무렵이 되었지만 갈래머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까닭 없이 화가 났습니다. 달호는 풀꽃으로 만든 목걸이와 반지, 그리고 팔찌를 모조리 개울에 던져 버렸습니다.
달호는 더위를 먹은 닭처럼 기운이 없었습니다. 밥맛도 나지 않았습니다. 머리 속은 온통 갈래머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가끔 꿈에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늘 좋지 않은 꿈이었습니다.
´내일은 볼 수 있을까?´
날마다 잔뜩 기대를 품고 개울가로 나가보지만 번번이 빈 가슴만 안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내일은 사릿골로 찾아가 볼까?´
하지만 갈래머리의 집을 모릅니다. 이름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갈래머리가 어디에 사냐고 사릿골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용기를 내서 말이라도 걸어볼 걸 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달호는 갈래머리를 볼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것은 다시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 때문에 갈래머리를 기다리고 걱정하면서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몰랐습니다.
´잠시 내가 뭔가에 홀렸던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보는 낯선 갈래머리에 마음을 그렇게까지 홀라당 빼앗길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말 한 번 나눠 보지도 않고, 아는 것도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갈래머리는 어쩌면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 귀신이나 둔갑한 여우일지도 모르지.´
오월로 접어들자 개울둑에 풀이 제법 자랐습니다. 갓 자란 풀이라 연해서 소에게 먹이기에는 딱 좋았습니다.
달호네 누렁이가 새끼를 뱄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여느 때보다 여물을 많이 먹었습니다.
달호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누렁이를 끌고 개울둑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뜻밖에도 개울건너에 갈래머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쳇!˝
달호는 혀를 차고 코방귀를 뀌었습니다. 목이 빠지게 기다릴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갈래머리가 저렇듯 아무 일 없듯이 태연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자못 얄미웠습니다.
그런데 갈래머리가 달호를 보더니 겅중겅중 징검다리를 건너왔습니다. 순간 당황한 달호는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갈래머리가 징검다리를 건너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갈래머리는 두 손을 허리 뒤에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비비 몸을 꼬더니 슬며시 볼에 보조개를 피웠습니다. 달호는 갈래머리의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지만 일부러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너 기다렸는데…….˝
갈래머리가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오……왜?˝
˝너도 기다렸지?˝
˝쳇!˝
˝우리 할머니 집에서 다 보인다. 너 개울둑에 앉아있는 거.˝
˝우……웃기고 있어. 우……우리 누……누렁이 풀 머……먹이러 나온 거지 누……누가 지 보러 나……나왔나.˝
갑자기 갈래머리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도 맺혔습니다.
˝너도 내가 싫은가 보구나.˝
˝그……그래 시……싫어!˝
달호는 왜 자꾸 까닭 없이 화가 나는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속마음과 다르게 자꾸 말이 삐딱하게 나갔습니다.
˝미안해.˝
갈래머리는 허리춤에 감추고 있던 무언가를 땅바닥에 내버리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가 버렸습니다. 갈래머리가 버리고 간 것은 네 잎이 달린 토끼풀이었습니다. 토끼풀은 세 잎이 달리지만 보기 드물게 네 잎이 달린 것도 있었습니다. 네 잎이 달린 토끼풀은 워낙 찾기가 힘들어서 그것을 찾으면 행운이 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달호는 네 잎이 달린 토끼풀을 집어 가만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욕이라는 욕은 다 퍼부었습니다.
´바보! 멍청이! 얼간이! 촌뜨기……!´
눈을 감고 있었지만 갈래머리의 어두운 얼굴이 자꾸 어른거려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부자리에 누운 엄마와 아버지도 보리타작과 모내기 일손을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엄마와 아버지가 나누던 말 가운데 달호의 귀를 사로잡는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달호는 숨을 죽이고 귀를 바짝 세웠습니다.
˝사릿골 욕쟁이 할머니네 손녀 얘기 들었수?˝
엄마가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욕쟁이 할머니네 손녀라면 서울 산다는 큰아들 종식이네 딸 말인가?˝
˝그래요. 우리 병두랑 얼쭈 비슷한 또래일 걸요 아마.˝
˝근데 그 애가 왜?˝
˝글쎄, 말을 못하는 병에 걸렸다고 하네요. 실어증이라나 뭐라나.˝
˝그런 병도 있는가?˝
˝그렇다고 하네요.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까지 당했나 본데 그것 때문에 어느 날부터 갑자기 말을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은 싫어하고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그런데요. 병원에 다녀봐도 나아지지 않아서 제 엄마가 사릿골 할머니네 집으로 데리고 내려왔나 봐요.˝
˝학교는 어쩌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도 매한가지여서 지 엄마가 당분간 학교를 쉬게 할 생각인가 보더라고요.˝
˝어린 게 안 됐네 그려. 우리 병두는 괜찮은가 모르겄네.˝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습니다.
˝우리 병두도 놀림 안 당하려면 말더듬는 버릇을 얼른 고쳐야 할 텐데…….˝
엄마도 긴 한숨입니다.
´갈래머리가 말을 못하는 병에 걸렸다니!´
달호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개울가에서 만났던 갈래머리는 틀림없이 말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것도 징검다리를 스스로 건너와 먼저 말을 걸었던 아이였습니다. 달호가 보기엔 갈래머리가 따돌림이나 놀림을 당할 만한 아이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도 내가 싫은가 보구나.´
달호는 갈래머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했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달호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마루에 내던지고 개울로 달려갔습니다. 꼭 갈래머리가 개울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개울둑을 달려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꽃무늬 양산을 쓴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 산모롱이를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낯익은 뒷모습이었습니다.
달호는 한달음에 두 사람을 쫓아갔습니다.
˝자……잠깐만!˝
갈래머리를 불렀지만 못 들었는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아…아줌마, 자……잠깐만요!˝
그제야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습니다. 갈래머리는 달호를 보더니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지었습니다.
달호는 숨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한참 땅을 내려다보며 숨을 고른 뒤 달호는 둘둘 말아놓은 종이 한 장을 갈래머리에게 불쑥 건넸습니다.
˝또 올 거지?˝
처음으로 달호는 말을 더듬지 않았습니다.
갈래머리는 엄마의 얼굴을 살피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그럼 잘 가. 오……오늘 우리 집 보리타작하는 날이라서 드……들에 나가봐야 돼.˝
달호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개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갈래머리는 달호가 주고 간 종이를 조심스레 펼쳐 보았습니다.
네 잎이 달린 토끼풀이 곱게 펼쳐져 종이에 붙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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