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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세종아동문학상수상작-잿빛 느티나무(강원희)
폐광된 탄광촌은 마치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을처럼 스산해 보였습니다.
먼지 덮인 잿빛 지붕들과 석탄재가 배인 거무튀튀한 길들, 그러나 지붕이 무너진 빈집들 사이에 드문드문 빨래가 널린 걸 보면 아직 이 마을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늘 잎새에 석탄 가루를 뒤집어쓰고 서 있던 동구 밖 잿빛 느티나무는 쪽빛 하늘에 짙푸른 잎새를 눈부시게 펼치고 있어 오히려 낯설어 보였습니다.
흑인 병사 아저씨는 당산나무가 서 있는 언덕에 서서 손 지붕을 하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 마을을 말없이 내려다보았습니다. 각시 바위 곁에는 잊혀진 듯한 무덤 하나가 비바람에 넘어진 비석을 부둥켜안고 있었습니다. 잡풀이 우거진 무덤 위에는 엉겅퀴꽃이 족두리처럼 화사하게 피어 있어 더욱 쓸쓸해 보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놓고 간 당산나무 돌무덤에는 그리운 어머니의 손길이 닿은 돌 하나도 보태져 있을 것이었습니다. 흑인 병사 아저씨는 각시 바위에 앉아 잿빛 어린 시절을 더듬었습니다. 산들바람이 산수유나무가지를 스쳤습니다.

흑인 아저씨는 생각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나 자신이 검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탄광촌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검은 석탄이 묻어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나도 그 아이들처럼 얼굴 빛이 검은 한 소년인 줄만 알았다. 다른 아이들은 개울물에 얼굴을 씻고 나면 달처럼 환한 낯빛이 되었다. 아무리 개구쟁이처럼 쏘다녀도 개울에 가서 씻기만 하면 요술처럼 해맑은 낯빛이 드러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이 다 가 버린 후에 혼자 개울에 남아 날이 저물도록 씻고 씻어도 검은빛이 벗겨지지 않았다. 어느 땐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도 보았지만 피만 배어 나올 뿐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을 지니게 되었다.
´왜 나는 아이들과 다른 것일까?´
피부는 새까맣고 머리털은 성냥불에 그을린 듯 곱슬곱슬했다. 그 무렵 어머니는 느티나무가 서 있는 삼거리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지 않은 거예요? 왜 나를 까맣게 낳아 주셨어요?˝
나는 어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울면서 말했다. 어릴 적에는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 때 나는 이런 마음에 그렇게 자꾸 울면 눈물이 뺨으로 흘러 내려 얼굴이 하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말없이 곱슬곱슬한 내 머리를 어루만져 주셨다. 그 때 내 목덜미에 떨구어지던 어머니의 뜨거운 눈물을 나는 기억한다.
아이들은 나를 ´까마종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까마종이를 따러 갈 때조차 나를 끼워 주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나는 늘 나처럼 검둥이 녀석인 내 그림자를 데리고 산으로 들로 혼자 쏘다녔다. 나는 석탄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잿빛 느티나무에 올라가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거기에서는 지는 노을과 뜨는 별이 환하게 보였다. 아무도 그림자처럼 깜깜한 나를 볼 수 없었다.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할 때 술래가 느티나무에 손을 대고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라며 눈을 감고 열을 세어도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잿빛 느티나무 꼭대기에 걸터앉아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곤 했다.
아이들은 아마 내가 숨기만 하면 찾을 수 없을 테니까 나를 술래잡기에 끼워 주지 않는지 몰랐다. 그렇다면 내가 술래가 되면 될 텐데도.
´못 찾겠다. 꾀꼬리!´
술래의 목소리는 마치 나를 향해 외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꾀꼬리처럼 느티나무 꼭대기에 꼭꼭 숨어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술래잡기를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동안 술래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들 중에는 들레라는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앤 번번이 술래가 되었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아픈 들레는 다른 아이들처럼 빨리 달아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들레는 그렇게 다리를 절름거리긴 했지만 늘 해맑게 웃는 아이였다. 들레가 웃는 걸 보면 언젠가 탄광촌에 뜨던 무지게를 볼 때처럼 괜스레 마음이 설레이곤 했다. 나는 몇 번인가 학교 가는 길에서 들레를 만나 책가방을 들어다 주곤 했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 반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이이와 싸움이 붙은 적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아이와 싸움을 했다. 그 애를 이기면 아무도 나를 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또래 아이들보다 몸집이 큰 편이었으므로 힘 겨루기로 그 애를 이기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내가 그 애를 넘어뜨리자 구경을 하던 아이들이 우루루 한꺼번에 내게 덤벼 들었다. 나는 보릿자루처럼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주르르 코피가 흘렀다. 아이들은 나와 싸움을 했던 그 애를 에워싸고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책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책들을 함께 주워 주는 손길이 있었다. 그 애가 손톱에 들인 꽃물이 어둑어둑 노을이 질 녘에도 불을 켠 듯 환해 보였다.
˝비겁하게 여럿이 덤비다니……. 나쁜 아이들이야.˝
들레였다. 뒤쳐져 걸어오다가 우리들이 싸우는 것을 본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는 들레에게 눈물을 보인 것이 부끄럽기만 해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나는 개울물에 얼굴을 씻으면서 다른 아이들처럼 코피도 붉고 눈물도 맑은데 왜 그토록 따돌림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흐르는 개울물에 눈물을 보태고 또 보태었다. 그 날 저녁 어머니는 등잔불 밑에서 내게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내 아버지는 미군이었지.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싸우러 왔다가 이 땅에서 전사하셨단다. 그러나 너는 결코 네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해선 안 된다.˝
등잔불에 비친 어머니의 큰 그림자가 펄렁거렸다. 결국 내 어머니는 미군 병사를 만나 나를 낳은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나는 탄광촌 사람들이 어머니를 대하는 눈빛이 왜 그다지 곱지 않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 때 부터 내게는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무던히도 어머니 속을 썩혀 드렸다. 그 아픔은 당연히 검둥이 아들을 낳은 어머니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날도 나는 밤이 깊도록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잿빛 느티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별을 헤아리고 있었다. 내 살빛처럼 검은 밤하늘 어디쯤 아버지가 살던 나라에는 저 별이 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때 느티나무 밑에서 두 노인이 두런두런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먼산댁 말이야. 아이는 왜 낳아 가지고 저 고생인지 몰라. 그것도 검둥이 아이를 말이야.˝
˝그런 소리 말게. 다 그놈의 몹쓸 전쟁 탓이지.˝
˝그런데 듣자 하니 그 검둥이 아이도 먼산댁이 낳은 아들이 아니라는구먼.˝
˝그럼, 친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피난길에서 만삭이 되어 아기를 낳은 여인을 도와 주었다는데 받아보니 검둥이었다지. 아마 애 어미가 애를 낳자마자 죽어 그 아이를 먼산댁이 거두어 키우는거라고 하더군.˝
그 말을 엿듣던 나는 하마터면 나무 밑으로 떨어질뻔 했다. ´어머니가 날 낳아준 친어머니가 아니라니.´
나는 도리질을 했다. 밤하늘 별들도 내 고개짓을 따라 도리질을 했다. 방글방글 느티나무 잎새가 돌았다. 내가 뱀에 물려 발목이 퉁퉁 부었을 때 입술을 대고 상처를 빨아 주던 어머니의 더운 입김이 생각났다. 왜 하필 그 때 그 생각이 나던지. ´그런 내 어머니가 나를 낳아 주신 친어머니가 아니라니…….´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어머니의 가슴이 숯덩이가 되도록 속을 태워 드린 것이었다. 그 날 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서울로 가는 밤 기차를 탔다.
´철거덕 철거덕.´
기차 레일 소리가 마치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작정 서울로 간 나는 주로 역 대합실에서 웅크리고 새우잠을 잤다. 구두닦이를 하면서 얼굴에 검은 구두약을 묻히고 지내던 나는, 어느 날 나와 똑같은 모습의 외국인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 분의 도움으로 내 아버지의 나라인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흑인들만이 모여 사는 시카고의 한 도시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았다. 그러면서 나는 인종 문제가 한 소년이 겪었던 잿빛 설움보다 더 엄청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어 내가 태어났던 나라와 똑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탄광촌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이 점점 투명하게 다가왔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은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잊기 시작해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맨 나중에 잊는다고…….
나를 키워 주시던 어머니가 홀로 눈물짓는 모습이 등잔불에 펄렁대던 큰 그림자가 되어 자주 꿈속에 어른거리곤 했다. 살 한 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내게 그토록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시던 어머니…….
나는 30년 세월이 지나서야 내 아버지가 싸워 지킨, 그리고 날 낳은 어머니가 살았던, 아니 그 무엇보다도 그 땅에 두고 온 나를 키워 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때만 해도 탄광촌의 고갯마루를 지나던 흰 구름은 먹구름이 되어 흘러가곤 했습니다. 쪽빛 하늘에는 한 무리 양 떼처럼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각시 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고세 아이고 풀을 먹이고 있는 하얀 염소도 아마 그 시절의 까만 염소가 검은 때를 벗은 모습일지도 몰랐습니다.
˝얘야 너 이 마을에서 사니?˝
흑인 병사 아저씨가 물었습니다.
아이는 검둥이 아저씨가 무서운지 겁먹은 눈빛으로 까까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혹시 먼산댁 아주머니……. 아니 지금쯤 할머니가 되셨겠구나. 먼산댁 할머니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니?˝
아이가 도리질을 했습니다. 흰 염소가 까만 콩자반 같은 똥을 누었습니다. 그 옛날 어린 시절에 들은 말이지만 석탄 가루는 배설이 되어 이 탄광촌 사람들도 염소처럼 검은 똥을 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살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마을을 떠났어요. 탄광이 문을 닫았거든요.˝
˝그렇구나.˝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라면 혹시 아실지도 몰라요.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고 계시거든요.˝
˝그렇다면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 줄 수 있겠니?˝
흑인 병사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아이는 염소를 말뚝에 매어두고 앞장서 걸어갔습니다. 아이를 따라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흑인 병사 아저씨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징검다리들은 옛날 그대로인 듯 낯이 익었습니다. 그 돌 위에 앉아 얼굴을 비추며 낯을 씻던 소년의 모습은 어디로 흘러가고 낯선 중년의 사내가 개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흑인 병사 아저씨는 아이들 따라 마타리꽃이 핀 길을 지났습니다. 이제야 탄광촌의 꽃들도 제 빛깔을 찾은 듯 했습니다. 아이가 푸른 이끼가 낀 야트막한 담장을 끼고 돌아 빠끔히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할아버지, 누가 찾아왔어요?˝
이이가 미닫이문을 열자 방안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머리말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얼굴은 마치 개울가에 놓인 징검다리처럼 낯이 익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탄광촌에서 일 할 때 사고를 당하셔서 앞이 보이지 않으세요.˝
아이가 말했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 왔소?˝
할아버지가 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저, 30년도 더 된 일입니다만 삼거리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먼산댁이라고 혹시 아시는지요?˝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오래 된 옛날 이야기를 끌어내려는 듯 잠시 먼 곳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살았었지. 검둥이 아이 하나를 데리고……. 그 아들이 나가자 먼산댁은 가게 문을 닫고 아들을 찾아 나섰지. 떠났다가는 다시 돌아오고, 떠났다가는 다시 돌아오곤 했었지. 혹시나 검둥이 아들이 집에 돌아와 있을지 몰라서 말이야. 그리고 노을이 질 무렵이면 각시 바위에 앉아 넋을 잃고 하염없이 다들을 기다리곤 했었어. 어느 땐 마치 아들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이 아들 이름을 불러 보기도 했지. 그러다간 그 겨울에 풍이 들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 먼산댁이 검둥이 아들을 데리고 탄광촌으로 흘러들어 온 건 검둥이 아들 하나 잘 키워 보자고 한 모양인데……. 이곳에서는 너나없이 검둥이 낯빛들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그 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그러다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네.˝
흑인 병사 아저씨는 힘없이 문지방에 풀썩 주저 앉았습니다.
˝너나 없이 탄광촌에 흘러들어 온 사람들에게 이 마을은 막장의 끝이었지. 하지만, 젊은이 막장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네. 늘 거기서 다시 시작하곤 했으니까.˝
할아버지는 혼자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먼산댁에 대해 묻는 댁은 뉘시오?˝
할아버지가 눈을 끔뻑이면서 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노인장.˝
흑인 병사 아저씨는 서둘러 대문을 나섰습니다.
˝은배야! 저 분께 각시바위 곁에 있는 산소를 가르쳐 드리렴.˝
할아버지가 목청을 돋구어 말했습니다.
˝네, 할아버지.˝
아이가 흑인 병사 아저씨의 그림자가 뒤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저 멀리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어머니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흑인 병사 아저씨는 이끌리듯 삼거리 느티나무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삼거리 구멍가게는 간 곳이 없고 잿빛 옷을 벗어 던진 느티나무 혼자 서 있었습니다. 흑인 병사 아저씨는 느티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쪽빛 하늘을 받치고 서 있는 그 느티나무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졌습니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결에 들려 오는 듯 했습니다.
˝못 찾겠다. 꾀꼬리!˝
흑인 병사 아저씨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아저씨! 저랑 함께 가요. 염소를 데리러 저도 각시 바위 쪽으로 가야하거든요.˝
아이가 가쁘게 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아이는 먼저 산길을 향해 앞서 갔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사진 말이다. 그 분이 누구시니?˝
아저씨가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제 아버지세요. 하지만 지금은 하늘 나라에 계세요.˝
아이는 마치 하늘 나라가 외국쯤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하늘 나라에 계시다니?˝
˝탄광에서 일하다가 막장이 무너져 돌아가셨어요.˝
˝그래? 거 참 안됐구나.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
˝이 자, 영 자, 춘 자를 쓰셨어요.˝
이영춘, 그 이름은 어릴 적에 아저씨와 코피가 터지도록 싸움을 했던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어릴 적 제 아버지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내 아버지와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단다. 같은 반이었지.˝
그러자 아이는 검둥이 아저씨가 아무렴 그랬을까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각시 바위에 가면 그 곁에 산소가 하나 있어요.˝
아이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을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염소가 묶여 있는 샛길로 걸어갔습니다. 그 무덤은 엉겅퀴꽃이 피어 있던 바로 그 무덤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쓰러진 비석을 바로 세웠습니다.
´강원춘의 묘.´
비석에 새겨진 어머니의 이름 석 자를 손바닥으로 쓸면서 아저씨는 비석 뒤에 새겨진 또 하나의 이름이 손끝에 만져보는 걸 느꼈습니다.
´아들 민국.´
그 이름은 참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아저씨의 한국 이름이었습니다. 아저씨는 비석이 어머니인양 부등켜 안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대한 민국 이란 이름을 따서 어머니가 지어 주신 그 이름은 오직 어머니만이 불러 주셨던 애틋한 이름이었습니다. 어느덧 해거름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각시 바위에서 그 때까지 검둥이 아저씨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넌 여태 안 가고 있었니?˝
아이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고개를 숙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아신다고 하셨죠? 그러시다면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좀 해 주시겠어요?˝
˝글쎄다…….˝
˝저는 사진으로 밖에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렇다면 아버지가 퍽 보고 싶겠구나.˝
아이는 시든 꽃대처럼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가만히 아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네 아버지는 씨름 선수처럼 아주 힘이 셌단다.˝
˝우리 아버지 손도 아저씨처럼 이렇게 컸나요?˝
˝그래.˝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까 아저씨의 눈에서 무지개를 보았어요.˝
아이가 느닷없이 말했습니다.
˝은배야!˝
그 때 산모퉁이에서 아이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어머니가 절 찾으러 오셨나 봐요.˝
아이가 아저씨의 손을 놓고 저만치 뛰어갔습니다. 아저씨는 산모퉁이를 돌아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걸어오고 있는 아이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퍽 낯익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먼 나라에서도 꿈속에서 눈물로 불러 보던 그리운 들레가 거기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검둥이 아저씨를 보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아이가 말뚝에 묶인 흰 염소의 고삐를 풀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산비탈을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산들바람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날렸습니다.
어머니의 치마도 풀렁 날렸습니다. 염소를 끌고 가는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바람개비처럼 손을 흔들었습니다. ´잘 가거라. 그리고 아버지가 보고 싶거든 개울물에 네 모습을 비춰보거라.´
흑인 병사 아저씨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저녁놀이 졌습니다. 저 멀리, 그토록 낯설기만 하던 푸른 느티나무가 잿빛 느티나무가 되어 30년 전의 옛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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