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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검은잎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1988.11) 기형도 시집 맨 앞에 나온 시작 메모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했던 시인이다. 하지만 가장 시를 위한 시를 쓰고 싶어했던 그는 그런 시를 쓸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속한 거리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산업화를 거친 근대화 도시 안에서 그는 그가 쓰고싶어하는 자연과 교감할 수 없었다. 시인 기형도가 바라본 세상은 안개가 자욱한 세상이다. 자욱한 안개는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안개로 인해 우리는 한치 앞을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안개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심신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기형도가 바라본 우리의 현 모습은 이렇듯 안개가 자욱한 사회였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의심조차 할 수 없이 휩쓸려 나아가고 있는 사회를 기형도는 안개가 자욱한 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이 안개를 결코 걷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적이리 만큼 냉혹하고 강고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개를 즐기는 여유를 가지고, 나아가 안개를 재생산하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그는 안개를 걷어버리는 일에 관해서 일말의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나아감이 없는 것... 그의 시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평해진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어들과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그의 시어들이 그의 무의식세계에서 흘러나온 이해 불가능한 의미 없는 어구들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이 거리를 현실을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시에 리얼리즘을 느낄 수 있다. 결국 그는 그가 바라던 자연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29살 젊은 나이에 시집 한 권을 세상에 내놓은 채로 죽었다. 이러한 그의 죽음은 기형도의 시를 더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이끌어 간다. 그렇다면 그는 패배주의 자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극단적인 절망은 분명 우리 삶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단 한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보내고 죽은 가여운 그가 하늘에서는 그토록 바라던 자연 속에서 마음껏 시를 지었으면 한다.


by 영풍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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