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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떨림 |  | |
| -- 평소에는 책 한권 안 읽는 여자가 웬일인지 이 책을 한나절 만에 다 읽어 버리더라구. 도대체 무슨 책이야? 며칠전 내 집을 찾아온 남동생이 책 한 권을 내밀며 이와 같이 말했다. 동생이 말하는 여자란 동생이 근무하는 호텔 프런트데스크의 여자직원일터였다. 그녀가, 이 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주 재밌게 보았다 한다, 그런 그녀는 자신이 다 읽은 책을 별 망설임 없이 동생에게 주었다 한다.
근간 신문지상마다, 이 책에 대한 서평들을 접했던 터라 잘 되었단 생각으로 덥썩 책을 집어 들었으나, 오래전 3분지 1쯤 읽다가 아직도 읽지 않고 있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처럼 이책은 내게 참으로 읽히지가 않았다. 역시나 한- 반 쯤 읽고는 가방 속에 내내 가지고 다니다가 감상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일요일 하루 공들여 처음부터 다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1. 예술의 경계는 어디까지 일까?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며 실로 내가 고민했던 것은 법의 심판까지 받았던 장정일이나 마광수의 소설과 도대체 이 책이 어떤 차이가 있을 까 하는 점이었다. 어떤 책은 사회적으로 욕을 먹고 그 작가들이 매장되고 어떤 소설은 성애의 미학으로까지 격찬을 받은 연유가
무엇일지 실로 궁금했던 것이다. 시대가 변한 탓인가, 아니면 그 어떤 힘의 논리가 작용된 것일까. 마광수나 장정일의 소설과 이 소설의 비교된 생각은 여기에 적지 않겠다. 어디까지나 이 자리는 <떨림>을 논하는 자리로 남겨 두고 싶다. 또 섣불리 아는 척 할 문제도 아닐 것 같다.
어쨋거나 이 책에서 나는 마냥 삼류 애로소설적이지 만은 아닌, 우리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성애의 문제들을 작가만의 시각으로 분명한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여러곳 노력한 흔적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만약 그런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간접 선전해준 각 중앙 일간지의 문학 담당 기자들을 많이 욕했을지도 모르겠다.
<딸기>에서 화자는 어린 자매 미성년과 관계를 했을 지언정 현재까지도 그녀들의 모습을 딸기라는 과일과 연결시켜 풋풋하고 깨끗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샌드위치>에서 매독으로 죽어가는 창녀를 보면서 성욕을 느끼는 행위는 언뜻 변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모두가 꺼리는 그 더러움 조차초월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성애의 욕구라고 말하는 작가의 문장에 충분히 공감을 형성 할 수 있다. <우산>에서 이십 년 만에 만난 여고 동창생에게서 느낄 수 있는 중년의 감정은 마치 내가 경험하는 것처럼 섬세하게 다가왔다.
그밖에도 성적 욕망을 나팔꽃에 비유한 것이나, <피크닉>에서 소풍의 가벼운 이미지를 빌어 따분한 중년들의 솔직한 심정을 끌어내는 기술이나 <베게>에서 끝까지 늙고 싶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예순 넷 여인의 모습 등등은 이 소설을 결코 가벼운 연애 소설로 치부하지 못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다. 대부분의 연애 소설들이 연애의 그 자극적인 장면에 치중한 반면에 이 소설 속 화자는 남녀의 사랑 행위, 즉, 욕망 그 자체를 하나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순수한 행위자체로 격상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2. 여자, 혹은 남자의 입장에서 읽기
남자에 의해 쓰여저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소설은 많은 부분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간추리고 결론내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물론 화자가 관찰자의 대상으로 상대방 여자들을 관찰한 주관적인 생각을 옮긴 것이 될 터이므로 그것이 그닥 큰 오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화자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성애, 섹스, 인간 욕망 자체의 아름다움-- 이라는 공식을 도출하기 위해 이 소설 속에서 숱한 여인들이 받았을 상처들은 아주 가볍거나 별일 아닌 일이 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성년 자매가 그들의 차후 성장 과정에서 받았을 성의 상처들, 집단 윤간당한 모자라는 여학생과 그들 부모들이 받았을 상처들, 주인공과 몰래 바람을 피운 여자의 남편들이 받았을 그 통한의 상처들이 이 글에서는 성의 아름다움, 존재의 떨림이라는 조금은 가당찮은 그럴듯한 언어의 포장지에 싸여 그것들이 미화되고 독자들의 마음과 의식에 잘못된 바람을 불러 넣지나 않을지 역시나 나는 걱정이다.
3. 화자(작가가 아닌 글속 화자)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
또한 이 글 속에서 관계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극도의 오르가즘을 경험하고 섹스에 있어서도 무척 대범하고 적극적이다. 이것은 작가가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착각이 그대로 녹아났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과연 우리 주변에서 이런 여자들이 열에 몇 명이나 될까. 열에 두서넛에 불과할 것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또 섹스 행위에 있어서 그녀들의 연기를 화자는 일일이 진실이라고 믿고 혼자 만족해 왔던 것은 아닌가. 천편일율적으로 적극적이고 쾌락적인 여성들만 등장 시킬 것이 아니라 성에 있어서 소극적이고 불감한 그런 여성들을 골고루 등장 시켰더라면 좀 더 글이 빛나지 않았을까,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다.
또 이 소설 속에서처럼 기본적으로 욕망과 섹스에 대한 몸의 구조가 다른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쉽게 옷을 벗고 유혹당하고 혹은 남자를 대등하게 유혹할 수 있는 존재들인지도 역시 나는 의문이다. 내가 아는 한 이 부분에 있어서 여자들은 절대적으로 피동적이다.
4. 왜, 떨림인가
작가가 소설에서 여러번 강조하고 있는 떨림은 글자 그대로의 떨림이다. 즉, 다시 말하면 유년 시절 최초 이성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서의 <떨림>그 호기심의 떨림은 이후 새롭게 여자들을 만날 때마다 변함없이 유지된다. 심지어 작가는 이 육체적 <떨림>을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가장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떨림의 경지에까지 이끌어 놓고 있다. 이 소설을 글자 그대로 읽고 해석하면 참으로 남성 중심적이고 오만 방자한회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의 일대기가 된다. 소설 속에서 등장 인물들이 그들의 욕망을 위해 섹스를 벌일 때 그에 준하는 수많은 상처받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욕망의 떨림보다 선될 순 없다. 즉, 섹스와 애정 자체의 떨림의 순간을 위해서는 세상의 법규로 제한된 그 어떤 것들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말한다. 섹스, 혹은 성애의 욕망 자체는 모든 것을 초월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행위의 하나라고.
판단은 이 책을 읽으신 여러 님들 각자의 주관에 맡기겠다. 신문에 실린 책 광고의 메인 카피를 보니 ˝존재의 안쪽으로 가는 탐미적 성애의 고백˝이라고 돼 있다. 맞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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