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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노벨
◆ 어린시절

알프레드 베르하르드 노벨(Alfred Bernhard Novel)은 1833년 10월 21일 건축기사였던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과 어머니 앙드리엣다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죽은 아들까지 쳐서 네번째인 알프레드가 그의 부모가 정녕 원하는 자녀였는지에 대해서 많은 전기작가들이 회의를 품고 있다. 왜냐하면 이 때 아버지 임마누엘은 연이은 사업실패와 화재로 파산선고까지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알프레드가 아홉살이 될 때까지 일가는 궁핍의 밑창에서 헤메고 있었다. 어머니는 길거리에서 야채 장수를 하고 두 형은 길거리에서 성냥을 팔아 생계에 보탬을 주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 임마누엘에게도 기회가 왔다. 재정 러시아에 있는 한 유력한 정치가의 후원을 받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에서 크게 성공했다. 러시아에 건너간 그는 여러가지 기뢰나 수중 화약의 제조 등 무기 제조에 종사하여 크게 기업을 일으켰다.

이 때는 마침 러시아가 영국을 상대로 크리미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무기류와 화약의 수요는 많았던 것이다. 일가족 모두 페테르부르그로 이사하고 알프레드등 네 사람의 형제들을 위해서 화학, 역사와 외국어를 가르치는 네 사람의 가정교사가 붙게 된다.

학교교육보다는 집안에 가정교사를 두는 것이 당시 부유층의 관례였다. 가난과 부유함의 양극단을 헤메던 노벨 집안은 이래서 알프레드에게 평생 규정교육이라고는 2년여의 초등학교 과정만을 받게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어려서부터 영리한 아이로 주변의 칭찬을 받았으며 가정교사들에 의한 최상의 교육은 노벨 형제들로 하여금 높은 이상과 독립심을 기르게 하였고 또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게 만들었다.

어학력은 나중에 알프레드가 다국적기업을 유지, 발전시키는데 큰 힘이 된다. 젊었을 때 불란서 철학자 볼테르의 작품을 스웨덴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다시 불란서어로 재번역하여 원전과 비교해 봄으로써 자신의 어학력을 테스트해 보았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의 공장에서 다루는 화약과 관련한 화학공부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한때 부자였던 아버지 덕으로 20대 전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와 미국등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화학을 연구하고 발명가들을 만나고 또 견문을 넓힌 것도 노벨이 있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다이나마이트를 발견하다

노벨은 평생동안 355개의 특허를 획득하였다. 최초의 특허는 폭약과 관계가 없는 계기의 개량에 관한 것이었다. 크리미아 전쟁이 끝나고 무기제조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다시 파산하기 전인 알프레드가 24세 때였다.

막상 폭약으로 특허를 받은 것은 아버지가 파산하여 페테르베르그를 철수하고 스웨덴으로 되돌아 온 이후인 1863년 30세 때였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군사용 폭약제조에 종사했기 때문에 폭약을 개조하는 것은 노벨에게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소브레로라는 프랑스 기사가 발명한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당시로써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폭약을 소개 받으면서 노벨의 천재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위험성이 매우 높으니까 실험에 사용하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발견자의 충고를 무시하고 알프레드는 이 강력한 폭약의 장래성을 예견하고 안전하게 수송하고 강력하게 폭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 하고 또 실험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니트로글리세린과 흑색 폭약을 혼합시키고 그리고 혼합물을 보통의 도화선으로 폭발시키는 실험을 여러차례 시행했다. 폭발력은 크지만 액체상태였기 때문에 수송이나 시공중에 폭발해 버리는 일이 많아서 위험했다.

그러나 기업으로서는 성공했다. 획기적인 다이나마이트의 제법에 관한 발명은 1867년으로 그가 34살 때였다.


다이나마이트의 발견은 불완전한 폭약으로 많은 사고에 시달리던 광산 또는 파나마운하와 같은 대규모의 공사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음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19세기말 제국주의가 팽창하여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군비 확장을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때를 잘 만난 것이었다.

처음 다이나마이트는 규조토라는 일종의 황백색 흙에 액체상태의 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시킨 소위 규조토 다이나마이트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은 폭발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더 많은 연구 노력을 통해서 소위 폭발성 제라친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을 사용한 무연화학 바리스타이트 까지를 완성한다.

다이나마이트와 바리스타이트라는 운반에 안전하고 폭발 조작이 쉬운 폭약의 발견과 발전은 공업, 광업 등에 크게 공헌을 하게된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군사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한다.

특히 당시의 파나마 운하 공사에서 크게 기여를 하였다. 당시의 질 나쁜 폭약은 운반중에 그리고 폭발조작중에 많은 사고를 일으킴으로서 공사자체에 큰 어려움을 안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 사업가로서의 알프레드 노벨

노벨은 이 발명과 특허의 획득으로 엄청난 재산을 만들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스웨덴에서 그리고 독일의 함부르그에서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기업을 일으켰다.

폭발력이 크고 취급이 안전한 다이나마이트의 수요는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20개국 이상에서 대략 80여개에 이르는 오늘날 이야기하는 소위 다국적기업을 일으켰다.

독일과 스웨덴의 공장을 제외한 미국, 영국,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본국인 동업자를 한사람씩 선택하여 공동으로 사업을 벌였다. 1870년대는 유럽전체가 무역붐이 일어나서 사업은 매우 흥청거렸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격렬한 경쟁과 음모가 횡행했다.

국회의원을 매수하여 다이나마이트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시판을 못하게 하는 입법을 하는 곳 또는 동업자가 배신하여 큰 손해를 보는 곳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파나마 운영회사를 매수하여 다이나마이트를 팔려고 하다 들통이 난 동업자 때문에 입은 큰 손실과 이로 인한 프랑스 정부와의 불화로 프랑스에서 쫓겨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용기있게 대처하였다. 발명가이면서 동시에 대단한 사업가의 소질도 타고 났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부가 오늘날 노벨상의 기금이 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여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들이 지금도 있다. 영국의 Imperial Chemical Industries, 불란서 의 Societe Centrale de Dynamite, 독일의 Dynamit Nobel AG, 스웨덴의 Nobel Industrier AB들 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형 루드빗히도 노서아의 중앙아세아 지방 바쿠에서 정유공장으로 크게 성공했다. 미국의 석 유 재벌 회사들과 비교되는 규모였다.

알프렛드도 거액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10월 혁명으 로 모두 국가에 몰수되었다. 비록 그가 죽은 후이지만 이들 공장에서 그의 집안은 엄청난 손해를 입는다. 소련 혁명이 없었더라면 노벨의 이름은 노벨상 이외에도 세계적인 석유재벌로도 알려졌 을 것이다.

◆ 평화 운동에 참여하다

알프렛드는 모두 7남매의 형제 자매를 가졌다. 맨 위의 큰형은 어려서 죽었고 바로 밑에 동생 에 밀은 화약실험 도중에 사고로 죽었다. 결국 형 로드빗히와 로베르트 그리고 알프레드 3형제만이 성장하여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다.

7남매중 세사람이 유아 사망이었다. 당시의 가난은 매우 높은 유아 사망율을 낳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말까지 대략 100만명의 스웨덴 국민이 북 아메리카로 이민을 간것만을 보아도 당시의 스웨덴의 궁핍상을 알 수 있었다.

노르웨 이의 소설가 크누드 함순이 쓴 ˝굶주림˝이란 소설을 보면 실직한 작가가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서 들개가 물고 온 소갈비대를 뺏을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소설은 19세기 중엽 의 스칸디나반도의 사회상을 여실히 그린 것으로 1920년 노빌 문학상을 받게 된다.

노벨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벨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여자를 싫어하는 여성 혐오 주의자가 아닌 듯 하다. 그 증거로 그가 남긴 희곡 -그는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다-를 보면 20대 청년 시절에 파리의 어느 약국의 여자 판매원에게 한눈에 반하여 애를 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또 중년에 고액의 월급으로 고용한 비서 벨타킨스키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이 여자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으로 알프렛드의 구혼을 받아 드릴 수 없는 처지였다. 이 여자는 나중에 오스트리아의 귀족 폰 줏트너 와 결혼하여 남작 부인이 된다.

그리고 이 줏트너 부인은 ˝무기를 버려라˝라 는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저자로 스스로 평화운동가 로 알프렛드가 죽기전까지 오래동안 친교를 이루며 그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여자와 교환한 여러통의 편지 속에서 ˝두번 다시 전쟁 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매우 큰 파괴력을 같는 물질이나 기계의 발명을 하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것은 그가 죽은지 50년 후에 원자폭탄이라는 형태로 거의 현실화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의 영향력으로 해서

50년을 앞 당겨지 게 되었다. 재주가 남다르게 뛰어난 한 사업가의 이상이 어떻게 실현되며 인류를 어떻게 변모시키는가는 눈 부신 20세기의 과학 발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폰 줏트너 남작 부인은 그녀의 평 화 운동으로 1905년 노벨 평화상을 받게된다.


◆ 조피 헤스피와의 사랑

그는 또 43살 때 조피 헤스라는 유태인 젊은 여성을 사랑했다. 20살 밖에 되지 않는 조피는 꽃 집에서 꽃을 파는 소녀였다. 그녀의 신선미에 매료된 노벨은 적극적으로 조피에게 접근했다.

그러 나 조피에 대한 알프렛드의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 교양도 없고 지식도 없으며 알프렛드가 주는 돈으로 사지와 환락에만 정신이 없는 여자였다.

환갑이 다 된 노인으로서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지만 열성적으로 그녀의 뒤를 봐 주었다. 그녀가 교양을 몸에 부치고 예의 바르며 절제있는 생활 을 하도록 가르치려고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노벨의 사랑을 무시하고 경제적 후원만을 탐했다. 드디어 헝가리인인 젊은 장교의 아이를 임신함으로서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해 졌다. 영국 작가 버나드 쑈가 쓴 ˝피그마리온˝-My Fair Lady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크게 힛트 한 -의 이라이자 두릿틀이라는 무식한 꽃팔이 소녀를 히긴스 교수가 가르쳐서 결혼을 하게 된것 과는 대조가되는 그런 장면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조피는 계속해서 알프렛드에게 경제적지원을 요구하고 또 실제로 알프렛드가 죽을 때까지 18년 동안 도움을 받았다. 이때 만일 조피가 선심껏 알프렛드의 사랑을 받아 드렸다 면 그리고 그 사이에서 2세가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노벨상의 영광 자체가 지금과는 크게 다르게 이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노벨의 만년의 우울증세는 사업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서도 생겨난 것이었겠지만 조피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노벨이 죽은 뒤에도 조피는 노벨에게서 받은 2백 16통의 편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유언 집행자들을 찾아 다니며 비싼 값으로 팔려고 했다. 노벨상의 권위에 타격을 입힐까 두려운 유언 집행인에 의해서 타협이 이루어져 상당한 금액을 받았다. 이 편지는 지금도 노벨 재단에서 보관 하고 있다.


◆ 고독한 이상주의자

노벨은 다이나마이트 공장이 설치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주택을 마련하고 그 속에 실험실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다이나마이트의 개량 뿐만 아니라 흥미가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밤을 새워서 실험에 몰두했다. 그는 타고난 연구가였다. 다이나마이트의 발견 이외에 알프렛드가 행한 발견은 무수히 많다.

면화학을 사용하는 니스나 페인트의 제조, 석유를 장거리로 수송하는 파이프라인의 발상, 니트로세루로스에서 만드는 인조견사(레 이온) 등 그의 관심은 광학, 기계공학, 생물학, 생리학 등에까지 이르렀으며 심지어는 수열에 관한 연구까지 했다.

이곳 저곳에로의 장거리 여행, 연구 그리고 사업에 따른 여러가지 개인적인 고통등으로 그는 심 한 두통과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거기다 오랫동안 정들어 왔던 불란서와도 알력이 생겨나면서 파리에서는 더 이상 실험실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태리의 쌍레모로 거주지와 실험실을 옮겼다.

지중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있는 이곳에 서 말년을 보냈다.

1885년 55세때 형 루드빗히의 죽음을 알프렛드의 죽음으로 잘못 안 불란서의 어느신문이 그를 ˝죽음의 상인 알프렛드 노벨˝이라는 제목을 뽑아보도하는데 크게 놀라고 상심한 그는 유언장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오보라고 하지만 자기의 죽음을 이렇게밖에 받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충격을 받은 것이다. 폭약이나 무기의 제조 판매로 얻은 이익을 단순히 개인이나 가족의 이익으 로만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7년에 걸쳐 도합 3번씩이나 고쳐 쓴 그의 유언장은 일관해서 인류의 복지향상과 전쟁의 억지 또는 방지 노력에 대한 보상을 위한 상을 생각하고 있 었다. 주로 조카들인 유가족에게 남기는 유산액 때문에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마지막으로 유산 액을 크게 줄이고 노벨상 기금으로 대부분을 남겼다. 그리고 1896년 12월 10일 63세를 일기로 이 태리 쌍레모에서 뇌일혈로 집사 한 사람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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