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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윤흥길의

.........´장 마´를 읽고



작가「윤흥길」씨는 1942년 정읍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고, 효과적인 소설 습작을 위해 작은 갯마을에서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68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기와의 계절´로 등단한 후 1976년에 딸「예니」와 첫 창작집 ´황혼의 집´이 동시에 태어난다.
출판사 ´일조각(一潮殼)´의 사원을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떠난 이후 전업작가로 생활하던 중 1977년에 두 번째 창작집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출간하여 제4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에 「한국문예」에 중편소설 ´장마´를 연재했다.
1982년에 일본 신조사의 특별기획으로 전작 계약을 맺어 집필한 장편소설 ´에미´를 한 일 양국에서 동시에 출간했고, 1983년도에 중편소설 ´꿈꾸는 자의 성´으로 제15회 「한국 창작문학상」을, 장편소설 ´에미´와 ´완장´으로 제28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기타 작품으로는 꽁트집 ´바늘구멍으로 본 세상살이´와 문학 수상록 ´문학동네 그 옆 동네´를 출간했다.
최근 작품으로는 1991년에 장편소설 ´옛날의 금잔디´와 ´밟아도 아리랑´이 있다.
1970년대의 한국문학에 있어 가장 화려하게 부각된 작가의 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나 「윤흥길」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과 10년 안팎의 짧은 기간에 획득한 그의 이러한 폭넓은 인기는 가령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기작가나 유행작가의 그것과 명백히 구별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인기작가나 유행작가가 항상 드러내기 위태위태한 단명(短命)의 징후같은 것을 그의 문학에서는 조금도 찾을 수 없다.
그의 문학은 오히려 본래적인 미덕이 간직하기 마련인 듬직한 중량감을 빚어냄으로써 우리의 확고한 신뢰감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는 우선 치밀하고도 섬세한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문학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얼핏보기에 그다지 모험적이거나 실험적인 작가가 아닌 듯 싶다.


「이상」과 같은 작가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무슨 두드러진 위트를 느끼기도 어렵고, 「최인훈」같은 작가에게서 보게되는 도도한 철학적인 흐름을 만날 수도 없다.
얼마 전 「김한수」씨 의 ´저녁밥 짓는 마을´을 읽었을 때 「윤흥길」씨 의 중편소설 ´장마´에 대해 감히 평했던 적이 있었다.

『이 소설 ´장마´가 처음 「한국문예」에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소설에서 문체와 시점의 힘을 발견했었다. 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던 1945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의 눈은 정치적으로 탈색되어 있었고, 그것이 오히려 투명에 가깝게 돋보기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1인칭은 놀라운 설득력을 담보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깨달았다. 마치 사형수나 환자의 수기를 읽는 독자들이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감동이란 그렇게 다가왔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행간의 숨은 의미들과 문체의 애매모호함이 역설적으로 리얼리티를 강화 시켜준 ´장마´의 문체는 사람들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아무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이야기할 수 없었던 시대상황에서 비롯되었기에 ´장마´는 자연 그대로의 장마가 가진 이미지로 기억되었다.』

비록 부족한 능력과 낮은 수준에서 감히 1970년대 한국문단을 대표했던 작가를 평했다는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작가와 작품을 평했다고 하는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닌 ´장마´를 통해 1970년대 시대상과 그 때의 생활들을 만나보고자 하는데 더 큰 의의와 의미를 두고자 한다.

주인공인 ´나´는 할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가 한집에서 같이 사는 집의 외동아들이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돌아가셨고, 외할머니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아들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죽고, 외할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국군으로 가서 죽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은 장마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끝나는 시점이다.
할머니는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도 죽은 자신의 아들(나에게는 삼촌) 이야기만 나오면 말이 끝날 줄 모른다. 그 당시 살기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에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삼촌의 경력은 할머니의 자랑거리였으며 희망이었다.


그런 동생이 좌익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빨치산이 되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할머니에게는 그가 하는 일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을 한다. 다만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배려를 해 놓아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유형의 인물이다.
그러던 중 삼촌이 몰래 집에 돌아와 돈을 가지러 왔을 때 호기심으로 할머니가 삼촌이 있는 방을 쳐다보던 중 삼촌은 밀정인 줄 알고 도망을 가게 된다.
그러다가 국군의 총에 맞아 죽게 된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할머니는 남은 인생을 후회와 죄책감으로 살아가지만 한편으로는 모월 모일 모시에 읍내 쪽에서 삼촌이 돌아온다는 점쟁이의 말 한마디에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
점쟁이가 말해 준 날이 되자 할머니는 음식을 장만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오질 않고 시간만 흐른다.
점쟁이가 말해 준 시간도 훨씬 지나고 나서 읍내 쪽 개울에서 매우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담 옆의 감나무에 올라간다.
할머니는 돌아온 삼촌이라 생각을 하고 구렁이를 본 순간 기절을 하였으며, 옆에서 지켜주던 외할머니가 가서 구렁이를 삼촌같이 대접해 준 후 내 쫓는다.
결국 할머니는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때맞추어 길고 지루했던 장마도 마침내 끝이 난다.

이 작품은 작중 액션의 진로와 그것을 펼쳐내는 그 문장의 토운 사이의 음계의 편차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중 현실 안에서는 대개의 경우 일종의 아이러니가 빚어진다.
작품 전체가 우중충해서 그가 펼쳐내는 작중 현실은 대강 윤곽을 잡은 것 같으면서도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가 이 작품의 음계의 편차이며, 그 원인은 바로 철없는 어린이의 시점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진술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레이터인 철없는 어린 아이의 눈과 작중 펼쳐지는 현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욱 든다.
또한 이 작품은 제목 자체가 풍기는 우중충한 분위기도 있지만 그 외에도 구렁이가 큰 몫을 담당한다.


이 작품에서 음산하고 신비스런 분위기를 발산하는 구렁이는 한국적 한(恨)이 서린 작중의 짙은 토속적 분위기 속에 혼연일체로 용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가 치뤄야했던 음산하고 저주스러운 동족상잔의 비극을 극명하게 표상하는 구체적 실체로도 부각되고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그리되 그것을 추상적 관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토속적 샤머니즘적인 한국 농촌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이 쉽게 전달 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전달한 것 같다.
가령 예를 들자면 시골 동네에서 과자를 들고 와 작중 나레이터에게 건네주는 상이용사라든가 그 동네 사람들이 한국전쟁 도중 최소한 가족이나 친지중의 한 사람을 잃고 살아가는 점, 등이다.
말하자면 한국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무슨 논리나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포착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심층 의식적 근원적인 차원으로까지 파고든 자리에서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이름이 의식의 상층부와 함께 샤머니즘이라는 의식의 하층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저주받은 사람이 죽으면 구렁이가 된다는 우리의 전래 무속신앙은 이 작품의 경우에 있어서는 결코 단순한 미신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빨치산을 하다 죽은 아들의 어머니인 할머니나 국군으로 간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야 했던 외할머니의 경우에 있어서는 우연히 나타난 그 구렁이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닌 필연의 결과이며 미신이 아닌 확신이요, 확증인 것이다.
그리고 가련한 이 두 노파의 한이 맺힌 설움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것은 저주로운 비극의 실체로써 우리들의 깊은 심금에 부딪쳐 오는 것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글을 풀어 씀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다 드러내는 작가의 의도가 실험적으로 다분히 깔린 작품으로써 이데올로기와 샤머니즘의 동격화를 통한 우리 정서에 알맞은 접근을 시도한 점 또한 매우 높이 살만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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