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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황지우(문학과 지성사)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를 읽고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는 지금까지 도합 다섯 권의 시집을 낸 황지우 시인에게는 8년 만에 낸다는 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녹색평론」을 이끌고 있는 김종철 교수의 우편물 더미 속에서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읽어 본 황지우의 시집은 두툼한 느낌이 마치 하얀 쟁반에 담겨져 나온 알이 꽉찬 슈퍼 옥수수를 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용한 시간에 시집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면서 가슴에 와 닿는 작품의 귀퉁이를 접어갔다.
보통 시집이 아니었다.
거기엔 시인 황지우의 8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펼쳐진 온갖 고뇌와 번민, 몸부림과 악다구니, 나아가서는 삶의 여유와 향기, 멋스러움까지도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나의 시선을 오래도록 붙잡은 것은 시인의 어린시절의 애환서린 추억들과 관련된 시 ´태양제의(太陽祭儀)´, 그리고 시인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관한 작품이다.
´이 세상의 밥상´, ´안부 1´,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고향´, 햄릿의 진짜 문제´ 등이 가장 찡하였다.
일찍이 청천(聽川) 김진섭(金晉燮) 선생이 그의 탁월한 수필 ´모송론(모頌論)´에서 ´나에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야 말로 나의 영원한 고향´이라고 갈파했거니와, 변화무쌍하던 황지우의 시도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노래할 때 가장 시인다운 면모를 드러낸다.
①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안부 1´ 부분)
② 어머니를 묻고 산을 내려와 뒤를 돌아보니 / 나주(羅州) 전역(全域)에 만발한 배꽃들이 / 땅위에서 가장 근사한 잔치를 베풀어 놓았다. / (중략) / 집에 돌아와 빈방에 혼자 누웠다. / 나는 내가 비로소 큰 짐을 부려놓은 듯 / 홀가분했고 이제 우주의 내 배꼽이 / 뚝 떨어진 듯 했다. / 한 차례 경련이 / 지나가고 나는 어머니께 말했다. / 당신은 제가 가장 사랑한 여자였어요. / 나는 곧 잠이 들었다.(´햄릿의 진짜문제´ 부분)

시란 읽는 이의 현재 처지나 심경과 가장 잘 맞아 떨어질 때에 감동이 생기는 것이거니와 위에 예를 든 시들도 내가 끊임없이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존재성에 대해 자기질문과 화두에 빠져있는 가운데서 나로 하여금 실없이 눈물을 적시게끔 만들었다.
한국전쟁 직후 지방 중소도시에서의 황량했던 50년대 풍경들을 읽으며 나의 기억 속에서는 서러운 영상들이 하나 둘 흐릿한 흑백필름 속에 떠오르는 실루엣으로 재생이 된다.
이성부 시인이 황지우의 이번 시집의 가족사 관련 작품들을 소통(疏通) 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하고 매우 긍정적인 세계라고 평가했지만, 나도 황지우의 이런 작품들이 과격한 언어실험이나 형태파괴, 혹은 해체주의에 몰두하던 시절의 작품들보다 한결 읽기에 즐겁고 기쁘다.
이런 작품들이 진짜 황지우 시의 진면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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