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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리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더니 |  | |
| 신봉선(작가정신)의
´천리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더니´를 읽고
처음엔 ´시사 만화가 박재동 화백의 어머니 이야기´라는 것에 더 솔깃했다.
그런데 막상 ´천리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더니´라는 책을 펴고보니 ´박재동´이란 인물은 사라지고 신산한 삶을 걸어온 한 여성의 역사만 오롯이 떠오른다.
가난한 농가의 셋째로 태어난 신봉선 여사는 맑고 밝고, 애살도 있고 욕심도 많았던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어떤 늙은이도 다 거쳐왔건만 나 혼자만 그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백합같이 곱고 아름다웠던 처녀시절을 돌이켜 본다.
선본 지 두 달 만에 혼인날을 잡고, 남편과 정을 키워가던 신혼시절의 수줍은 시간도 그립다. ´가난 속에 태어나서 왜인들 압박 속에 움츠리고 자라 전쟁 속에 결혼해서 정도 들기 전에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고, 낯선 곳, 법으로 맺은 부모형제를 찾아가 모든 나쁜 일은 내 탓으로 돌리고 참으며 소같이 살아온 6,70대 한 많은 여인들´의 시집살이 모습도 있다. 30년 동안 꺼질 듯한 남편의 생명을 지키며 아들 둘, 딸 하나를 가르치고 입히고 먹이는 일을 도맡아온 세월이 있다.
만화가게를 열며 풀빵장사에 연탄장사, 빙수장사까지 하며 불량만화 단속반에 쫓기며 아슬아슬하게 버텨낸 시간이 있다.
구김없이 살면서 자식들 제짝을 찾고 손주들까지 봤지만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고명딸까지 잃었다.
하지만 꼿꼿하고 고운 자태와 밝고 명랑한 미소에 그 모진 시절의 풍상은 가려진다.
다만 신봉선 여사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추억은 쌓일 뿐이다.
어디 신봉선 여사가 살아온 세월뿐이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이 걸어온 세월일 터다.
내 어머니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곧잘 추억을 들려주신다.
만주에서 타박타박 일본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갈래머리로 서울서 여고를 다녔던 한껏 부풀었던 소녀 시절, 너무 일찍 떠나버린 남편과의 행복했던 결혼 시절, 혼자서 다섯 남매를 키우며 겪은 힘들었던 일, 기뻣던 일...,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면 어머니의 눈빛은 빛나고, 목소리엔 생기가 흐른다.
추억에 담긴 인생의 고비는 사진을 박은 듯 그렇게 또렷하기만 하다.
어머니의 추억의 시간은 고통의 세월만큼 아름다운가 보다.
두 어머니께 이 책을 선물로 드렸다.
연배가 비슷한 신봉선 여사의 이야기는 곧 그 험난했던 우리 역사 속에 살아온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젊은 우리는 현재의 약속이 소중하기만 하고, 미래의 계획에 바쁘기만 했다.
소중했던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어느덧 잊혀지고, 불효하게도 추억을 가만히 들을 시간조차 없다.
그러다 불쑥 책에 담긴 또 하나의 추억을 만나니 잠시 나의 번잡한 일상을 젖힐 수 있었다.
평범한 여성으로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은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 굴곡진 삶을 걸어왔는지..., 그저 어머니로만 대해 왔지만 그분들 역시 젊은 우리처럼 모든 시절을 다 겪어온 한 사람 여성의 생이었음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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