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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복의 저하늘에도 슬픔이 |  | |
| 이윤복의 저하늘에도 슬픔이
박부호(parkbuho@hanmail.net )
다시 힘들다고 난리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더니 다시 경기가 말이 아니란다. 취업희망자는 넘쳐나는데 일자리는 없고, 그래서 가정이 깨지고 인생을 포기한 채 길거리로 나앉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우울한 뉴스가 줄을잇는다.
그런가. 정말 어쩔 수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길거리에 나앉아 체념할정도로 지금이 힘든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과연 이 소년이 헤쳐온 시절만큼 힘든지´를 생각해 보라며 내밀고 싶은 책이 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견디기 힘든 환경에서도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11세의 소년으로 기억되는 이윤복의 일기를 엮은 책이다.
1964년 주위의 도움으로 출간된 이 일기책은 당시 유명작가 김은국의 ´순교자´와 더불어 그 해의 양대 베스트셀러로 기록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그 이듬해에는 영화화돼 당시로서는기록적인 28만8천명의 관객을 동원, 화제를 낳기도 했다.
한 소년의 절박한 삶이, 그가 외치는 인간의 소리가 그 시대를 산 모든사람의 심금을 울린 것이었다. 바로 소설보다 더 감동적인 진실, 그 진실의 힘일 것이다.
월세를 못내 대구 남산동의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 같은´ 집에서 쫓겨나 앞산 밑의 염소우리로 이사간 윤복이의 동네는 현재의 앞산 보성아파트북쪽 언덕바지다. 애초부터 별반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보성아파트에서 내려다본 윤복이의 동네는 변해도 너무 변해 아무리 시계침을 거꾸로 돌리려고 해도 도대체 될성부른 일이 아니다. 그가 살던 무렵 이 동네는 초가가많고, 담은 갯가의 집들처럼 돌로 쌓아 올린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그 담밑으로 조그만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는데 이 모든 것이 세월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그냥 도회지의 주택가일 뿐이다. 고만고만한 단독주택들이붉고 푸른 기와를 머리에 인 채 올망졸망 늘어서 있고, 개울은 복개돼 도로로 쓰인다.
여기서 윤복이네가 처음 이사와 살던 염소우리와 견디다 못해 한달에 200원씩 주기로 하고 빌린 허물어진 흙담 사이의 움막집을 찾는 일은 부질없는 짓. 영화를 만들기 전 윤복이네 집을 찾은 시나리오작가가 ´문을 열자 악취가 코를 찌르고, 눈에 보이는 재산은 깡통 셋, 석유상자 하나, 아무렇게나 나뒹군 이불에서는 솜털이 마구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가난은 더 없을 것´이라고 초라한 일가족의 참상을 술회했지만 그 흔적을 더듬을 길이 없는 것을 어찌하랴. 배고파 우는 동생들의 말없는 채근에 못이겨 죽기보다 싫은 껌장사를 나가야 했고, 또 그보다 더하기 싫은,깡통에다 밥 얻어 오는 일도 윤복이의 몫이었는데, 그의 힘없는 발자국과끝없이 서럽게 흐르던 눈물은 이미 누구의 눈에도 비치지 않는다.
하릴없이 눈대중으로만 주변을 더듬다 문득 윤복이가 아버지의 약값과국수 살 돈을 벌기 위해 남의 집 염소를 먹이던 일을 떠올린다. 분별없는염소가 남의 집 채소를 함부로 뜯어먹어 밭주인에게 혼이 난 윤복이가 서러워 울던 곳이 있을텐데.... 그러나 앞산이 바로 지척인데도 염소를 먹일수 있을 만한 너른 풀밭은커녕 밭 한 뙈기 보이지 않는다. 오직 오른쪽으로 보이는 미군 부대 골프장의 잔디와 나무만이 푸름을 더한 채 홀로 무성해 공연히 부아가 치밀게 만든다. 남의 땅을 제 땅인 양 저렇게 넓게 쓰고있으니 말이다.
윤복이의 모교인 대구 명덕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병아리처럼 노란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의 체육 수업이 한창이다. 윤복이는 이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할 때 어쩌다 얻어 신은 고무신이 빨리 닳을까 봐 조심스레 뛰었지만지금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고급 운동화를 신은 채 거리낌이 없다. 이 운동장 구석 어디에서 점심시간만 되면 혼자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도시락먹는아이들을 부러워하며 윤복이는 숨어 있었을 것이다.
학교측에 윤복이의 생활기록부를 청했다. 빛 바랜 생활기록부에나마 남아 있을 윤복이의 슬픔을 엿보기 위해서였다. ´환경 탓에 활기가 없고 동정받기 원함´ ´용모 단정치 못하나 성실´ ´생활이 거칠었으나 차차 안정된마음으로 생활하고자 노력´. 담임들이 윤복이를 안쓰럽게 생각하며 평가한기록들이다. 그 옆에는 출결석일수가 기록돼 있다. 5학년 때 결석일수는무려 240일 중 72일. 염소를 먹이느라고, 껌장사한다는 이유로 희망원에잡혀 있느라고, 어쩌다 잔칫집에서 얻어 먹은 기름진 음식 탓에 배탈이 나서, 못먹은 탓에 힘이 없어 학교에 못간 날이 그만큼이나 많았던가.
껌 팔다 연고없는 부랑아로 몰려 윤복이가 늘 단골로 잡혀가곤 했던 시립희망원의 주소는 당시 성당동 산 46번지였지만 지금은 대명4동으로 행정구역까지 바뀌었다. 바로 경상공고의 북서쪽 지역이다. 경상공고에서 그일대를 내려다보자 시유지였을텐데 어떤 연유에선지 이곳마저 주택가로 변해 당시의 흔적은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시나리오작가는 ´서울에 있는 고아원은 이곳에 비하면 천당이다. 이처럼 지저분하고 처참한 광경을 보는 동안 여기에 잡혀온 아이들을 그대로 화면에옮겨 놓는다면 책임자나 시장은 인책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윤복이는 잡혀오면 늘 직원들이 자는 틈을 이용, 신발도 찾아 신지 못한 채 철조망 틈으로 도망가곤 했다. 여기서 윤복이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는 공동묘지도 있었다는데.... 한밤의 공동묘지보다도 당시 희망원의 처사가 더욱 무서웠던 모양이다.
윤복이가 껌팔이를 했던 중앙통 일대를 더듬어보다 생긴 지 수십년은 더돼 보이는 향촌동의 허름한 한 다방에 들렀다. 곧 허물어질 듯 삐걱대는나무 계단과 초라한 실내의 풍경이 되레 야릇한 향수를 불러온다. 금세 윤복이가 문을 열고 들어와 마담의 눈치를 보며 껌 한 통을 사달라고 애원할것 같은데 요즘은 신색이 초라한 할머니들이 어쩌다 껌팔이를 할 뿐 아이들이 껌 팔러 오는 일은 없단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묵묵히 앉아있으면서 30대에 요절한 윤복이의일생을 생각해본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는데 빈말이었던가. 흩어진가족이 모였고, 그도 단란한 가정을 꾸몄는데 ´저 하늘에도 슬픔이 있을까´하고 물어보던 일기장 속의 자신보다 더 어린아이를 남겨놓고 지병으로세상을 떴다니.... 슬며시 명치끝이 아려온다.
by http://paiwha.ms.kr/~phsh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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