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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한 연구 |  | |
|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한때 잘 팔리던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책에 보면 주인공인 청년이 온갖 종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내는 대목이 나온다. 독서 견문이 부족한 나로선 열거되고 있는 그 많은 제목들만 가지고도 공연히 기가 죽기도 했고, 과연 작가 자신은 그 책들을 다 읽기는 한 것인지 슬그머니 궁금해지기도 했었는데, 아무튼 그 중의 한 대목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맨 아래에 놓인 책은 제목이 선연히 보였다.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였다. 나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보다 뛰어나겠나 싶어 이내 호기심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사실 ´자살´과 ´죽음´은 같은 테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두 책의 비교가 썩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데, 어쨌거나 이 구절에 의하면 주인공(혹은 작가)은 박상륭의 <자살의 한 연구>라는 작품을 높히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이 책은 어떤 책일까? 무슨 논문 제목만 같은 이 <자살의 한 연구>는 그러나 소설이다. 작가는 박상륭. 대개의 독자들에게 이 이름은 조금 낯설 것이다. 이 작가는 벌써 오래 전에 캐나다로 이민한 데다가 국내에 있을 때도 발표 작품이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잘 나가는 인기 작가도 아니었다.
그런데 혹시 근래에 계간지 <문학동네>를 읽은 사람이라면 거기에 연재되고 있는 이 작가의 독특한 산문을 접해 보았을 것이다.
행갈이가 별로 없는 빽빽한 문단에다 수없이 많은 쉼표와 낯선 어휘들에 둘러싸인 그 글을 무척 짜증스럽게 읽었을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고, 그 빽빽한 숲을 헤쳐가면서 모처럼 신선한 글읽기의 맛을 느낀 독자들도 또한 있을 것인데, 어떻게 읽었든 독자들은 이 작가의 글이 퍽 별스럽다는 느낌에서는 일치하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그렇다. 박상륭의 글은 별스럽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소설 <죽음의 한 연구> 역시 우리가 이제껏 읽어 온 소설들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독특하고 낯설다. 그리고 난해하다. 500쪽 가까이 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이 소설은 우선 그 줄거리 요약조차 쉽지 않다. 꼭 줄거리가 복잡해서라기보다 표면의 줄거리 전체가 하나의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요약하는 일 자체는 큰 의미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줄거리로부터 접근하지 않는 한 이 소설을 해독할 다른 방법은 없다. 줄거리가 다만 상징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소설의 이해와 감동은 어쨌거나 ´이야기´를 통하여 전달될 수 밖에 없겠기에.
한 사내가 있다. 사내는 승려다. 어느 갯마을에서 창녀인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아이가 어머니가 죽고 난 후 한 스승을 만나 승려가 되었는데, 그것이 이 사내다. 스승은 어느 날 이 사내를 ´유리´라는 마을로 떠나보낸다. 사내는 유리에 들어가 자기 스승을 포함하여 세 명의 승려를 죽이게 된다. 이후 사내는 유리의 촌장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마른 늪에서 고기를 잡는´ 수행을 하게 되는데, 수행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사내는 유리의 판관인 촛불승에 의해 살인죄로 처형당한다.
이 간단한 요약에서 독자가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아, 이건 구도와 해탈에 대한 이야기로구나, 하고 우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틀리지 않다. 이 소설은 분명 구도로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설은 사내가 유리로 들어서서 처형되기까지의 40일간의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사내는 이 40일 동안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우치고 스스로 기꺼이 죽음으로 들어간다. 죽음의 완성을 통하여 자기 존재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구도의 이야기´라고만 간단히 말해 버린다면 이 소설의 참맛 혹은 참의미는 오히려 맹숭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차라리 이 소설에 그려지는 심오한 의미와 상징들을 하나의 배경으로만 받아들이면 어떨까? 실상 이 소설에서 해박하게 서술되고 있는 불교, 기독교, 연금술, 주역 등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이해되지도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그런 이해 없이 다만 이 사내의 행적에 나타나는 온갖 절실하고 애틋한 삽화들을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인간 숙명에 대한 어떤 저릿한 감동 하나는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이 소설을 한 낯선 사내의 슬프고 아름다운 생애로만 읽기로 하자.
이 사내의 죽음이 슬프고 아름답게 다가온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제대로 만났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만남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타의 다른 의미는 애써 정리하지 않아도 저절로 우리 가슴에 스며들게 될 것이다. 예컨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식의 심오한 화두가 아주 친근한 싯구처럼 우리 가슴에 젖어들며 우리에게 일정한 성찰을 가져다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이 소설을 다만 한 사내의 독특한 생애로만 읽기로 할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사내가 만나는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안에서 사내는 두 명의 여자와 정분을 맺는다. 한 사람은 ´수도부´라 불리는 창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순결한 처녀이다. 두 여자는 남자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애정을 느껴 이후 헌신적으로 사내에게 다가서며 자신들의 온몸과 마음을 바친다. 이 두 여자와의 짧은 정분은 소설에서 가장 뭉클하고 흥미로운 부분인데, 사실 그 정분의 시작과 과정이 소설적으로 충분히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예컨대 소설에서는 사내를 사모하는 여인들의 심리나 행위 동기를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으며, 사내와의 모든 관계가 지극히 즉흥적이며 비현실적으로 처리된다. 그럼에도 이 두 여인네와의 만남과 별리의 감정은 독자의 가슴에 서리서리 파고들어 흥건한 감동을 던져 준다.
바로 거기에 이 소설만의 독특한 형상화의 매력이 있다. 사실 이 소설에 나타나는 시간이나 공간은 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주술적 시공간이다. 때문에 소설에서 묘사되는 심리나 행위가 애초부터 다른 소설들처럼 사실적일 수는 없으며 사실적일 필요도 없다.
그러면 이 소설의 감동이나 진실은 무엇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가?
그것은 우선 작가의 독특한 문체이다. 이 작가의 문체는 얼핏 대할 때는 매우 산만하고 장황하게만 느껴진다. 게다가 쉴새없이 등장하는 쉼표와 낯선 어휘들을 거치다 보면 문장 전체가 꼭 무슨 암호문 같게만 여겨진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박상륭 문체의 매력이 깃들어 있다. 평론가 김현은 이 작가의 문장에 대하여 눈으로 읽을 때보다 입으로 읽을 때에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고도 있거니와, 확실히 독자가 일단 이 작가의 문체의 가락에 섞여들기만 하면 소설을 읽는 내내 노랫말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운율과 거침없이 자유로운 이미지의 확대를 느끼게 된다.
더불어 그러한 문체로부터 발현돼 나오는 어떤 격정이나 처연한 호소력은 단지 문장의 맛을 느끼게 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소설 공간을 하나의 신기 가득한 굿판이거나 혹은 경건한 제의의 장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문체의 힘이 이 소설을 미학적으로 이끌어 가는 외면적인 동력이라면, 소설의 내면에 깔려 있는 작가의 치열한 정신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제를 훌륭히 감당하고 있는 진정한 미덕이다. ´진정성´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단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이 작가의 치열한 정신은 그 자체로 강력한 흡인력이 되어 소설에 그려지는 정황 하나하나마다에 우리를 깊이 있게 동참시킨다.
이제 소설의 한 부분만 같이 읽어보자.
아래 구절은 여인과 헤어진 후 이윽고 눈이 뽑히고 혀가 잘린 채로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사내가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여인의 발소리를 들으며 독백하는 장면이다. 이 인용문 하나를 통해서도 독자는 이 소설이 보여주는 문체 미학과 독특한 서정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발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은 서투른 뜀박질인 듯한데, 그러고 보니 꼭 하나의 몫으로 들리고 있구나. 그것은 넘어지게 뛰어오고 있는 것이구나. 가까와지더니 순식간에 내 얼굴은 향기로 덮히는구나. 꼭 한 사람 몫의 따뜻한 몸이구나, 얼굴이구나, 눈물이구나, 그런데 어쩐 일로 너는, 비아냥거리는 말은 하지 않고 어깨만 들먹이고 있는가. 눈물 대신에 비아냥거려 주었더면, 내가 얼마나 훨씬 더, 너를 견뎌내기가 쉬웠을 것인가. 너의 눈물이 입술을 적시는구나. 그것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방울져 내리는 것은 아닌가. 드디어 네가 그러나 온 것이다. 내가 늘 한 몫으로 하나의 동경으로, 거기 멀리 두고 되돌아보았던 것이, 그것이, 여자, 네가 내게 온 것이다. 흰 옷고름에, 네 눈물 짜안한 것 다 적셔서, 저 저승 어두운 데 펄럭여 보내, 타는 저승 입술에 이슬이 지게 한다. 저승 입술에 이슬이 진다.
막상 옭겨 적고 보니 아무래도 맹숭하다.
그러면 다음 구절은 어떠할까. 아래 장면은 사내가 또 다른 한 여인과 밤거리에서 성교를 치르고 난 후 쓸쓸하게 작별하는 모습이다. 내가 읽으면서 왈칵 목이 메었던 대목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는 남녀의 성교가 중요한 비유로 사용되고 있어 이 장면은 자못 의미심장한 대목이기도 한데, 비유니 상징이니 하는 것을 떠나 그저 두 남녀의 정사로만 대할지라도 이 장면은 삶의 운명적인 쓸쓸함 같은 것을 잘 느끼게 해 준다.
˝안녕히 가셔요˝
하고 그 애가, 외로움에 병든 밤의 한 귀신 모양 비실거리고 가는 것이 아주 우울하게 보였다. 그 애는 결국, 한 떠돌이 중을 삼키지 않고 뱉아 버려서, 그 돌중이 간음기를 갖고 보았던, 그 읍의, 한 으슥한 더러운 구석의 쓰레기더미 위에, 그 중을 아주 끈적하고 탁하게 버려 버리고 있었다. 내일 새벽쯤엔, 개들이 와서, 저 물림 받은 객귀의 냄새를 흠흠거리게 되리라.
안녕히 가셔요. 아, 안녕히 가셔요.
한데 이 장면 역시 막상 옮겨놓고 보니 맹숭하기 그지없다.
그렇지, 신기가 올라 온몸으로 요동치는, 말하자면 한을, 못 이루고 넘긴 구비구비 저 한을, 푸르게 푸르게 게워내는, 속절없어라, 무녀의 넋두리 한 자락 같은 저것을, 한 구절 허리 툭 꺾어 여기 날것으로 인용한들, 그 카랑한 목소리와, 눈물, 구슬픈 눈빛을 어찌 살릴까, 당연 맹숭하기나 하지 예서 더 무엇을 기대하랴, 인용이 애초에 부질없는 짓.
이 소설은 한 사내가 득도하기까지의 기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득도란 불교적 의미에서의 해탈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사내가 승려라는 점과 자주 등장하는 선적 용어들로 해서 소설의 외면이 불교적 색채를 띠고는 있으나, 작가의 시선이나 사상은 딱히 불교적인 것에만 머무르고 있지는 않다. 40일의 고행이라든가 사내의 나이가 33세라는 것 등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사내의 행적은 오히려 예수와 닮아 있기도 하다. 그밖에 이 소설에는 주역이나 연금술 등과 관련된 신비적인 이야기들도 자주 등장한다.
결국 이 소설에서의 득도란 특정한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그 모든 사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작가 스스로 집요하게 명상해 보는 ´삶과 죽음´의 성찰인 것이다.
다만 윤회 사상에 대한 이 작가의 관심이 남다른 것은 분명한 듯하다. 하지만 이 또한 특정한 종교와 관련해서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윤회란 한 마디로 ´존재의 거듭남´이다. 우리들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열망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 내고, 그로써 자기 존재성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을 이 작가는 말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이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신비주의이든, 존재의 완성에 대한 욕구란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철학적 열망이 아니겠는가.
이제 이 소설의 주제를 말해보자. 소설에서 작가는 죽음의 완성을 통하여 존재의 완성을 말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고 있는 죽음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만약 원고지 한 장 정도의 말만 우리가 기억하고자 한다면, 박상륭은 소설 속의 어느 구절을 남겨주고 싶어 할까. 아마 다음 구절이 아닐까?
지혜는 그리고,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그렇게 과언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깨닫게 한다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는 잔인스러우나, 그렇다고 또한 피할 수도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모르고 산다는 일은 행복일른지는 모르나, 한계지어진 삶을, 불행하게라도, 보다 절실히 산다는 일과는 다른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죽어가는 자가, 죽음을 몰라 웃고 있는다는 일도 보기에 비참한 것입니다. 죽음과 늘 대면하여 산다는 일 또한 보기에 참혹한 일이지만 그래도 삶은 이제 거기서부터 그 세부에까지 체험되어지는 것이나 아닌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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