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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 나를 만질 때 |  | |
| <사랑이 나를 만질 때> (강규, 문학동네, 1997)를 읽다.
강규는 68년생으로 나보다 여덟살이 많은 나이다. (이상하게 이것이 나의 마음에 남는다)
소설집을 읽을 때면 전부 읽고 나서 처음의 차례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습관이다. 차례에 열거되어 있는 소설들의 제목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 소설의 내용을 먼저 떠올려 보고는, 주인공, 느꼈던 생각, 작가의 독특한 시선 등을 되새김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규의 이 소설집에서는 각 소설들의 차별적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이의 작품집이 -아마도 황순원일 것이다- 전방위적인 주제에 대한 시각을 보여준다면 (그는 슈퍼맨이다) 강규의 작품집은 일관된 주제에 대한 천착이 돋보인다.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는 논외로 한다)
<사랑이 나를 만질 때>를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윤대녕의 소설을 읽고 난 후와 흡사하다. 윤대녕의 장편 <은어 낚시 통신>이나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와 기타 유수한 단편들에서 그는 시원에의 회귀내지는 시간의 가역성에 대한 미련을 고집스레 -이는 내가 볼 때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보여주는데, 그런 기분이 강규에게도 여실히 풍긴다. 혹 두 사람의 나이까지 유사하지는 않을런지 궁금하다.
강규에게서 -윤대녕에게서도 마찬가지지만- 주되게 느껴지는 정서는 지난날에 대한 회고이다 삼십을 훌쩍 넘어 버린 나이가 되면 누구나 이십대를 돌아보게 되는 걸까?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세월의 무게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현기증을 느끼기도 하면서. 박완서는 지금도 <내겐 너무 쓸쓸한 당신>이라는 수작을 발표했다. 적어도 삼십대까지는 돌아보지 않고 나아갔으면 좋겠다. (물론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이미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성취하여 돌아볼 일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 더러 있다. 커트를 비롯한 숱한 Rocker들이 그랬고, 김광석이 그랬었나 보다) 후회는 나중의 갚아야할 빚일 뿐이다. 강규의 힘 없음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이다. 갈등하는 삼심대의, 너무 겉늙은 모습을 버리지 않는 한 더 이상 나아갈 길은 보이지 않게 된다. 제길, 이것마저도 윤대녕과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애초에 강규를 읽은 것은 여성적 문체와 삼수성을 접해 보려는 의도도 조금은 있었다. 신경숙이나 전경린, 은희경 보다는 신인 냄새가 나질 않는가? 글쓰기의 측면에서는 성별이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는 요즘이다. 작가는 결코 자기의 성별을 감출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성의 체득은 그나마 이 책을 읽은 소득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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