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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미의 이름 |  | |
| 움베르토 에코 : <장미의 이름>
역자 : 이윤기 / 출판사 : 열린책들 / 출판년월(초판) : 2002/3/25일 / 면수 : 121
서양 문명은 그 바탕에 기독교를 깔고 있다. 기독교를 모르고는 서양의 문화와 문명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기독교는 그네들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다. 일개 촌부의 밥상 위에도 하나님이 존재하고, 제국을 이끌어 가는 황제의 궁전에도 하나님은 존재한다.
성경은 유일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다양하고 무수하다. 하나님끼리의 다툼과 싸움, 증오와 갈등은 그러므로 당연하다.
소설가라기보다는 기호논리학자인 에코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서로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수탈하고 다투며 이간질했느냐에 주목한다. 서양사는 하나님을 가운데 둔 투쟁의 역사라 하여 지나치지 않다. 서기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로 기독교는 서양 사상의 중심에 서게 되고, 이로 인해 기독교는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통치자에게 어리석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대신 기독교는 세상 권력의 꿀맛을 나눠 가지게 된다. 황제에겐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신은 그 권력의 단맛을 나눠가지게 된 기독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는 법. 기독교의 세력이 커지면서 교황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게 되고, 이제는 세속의 황제조차도 교황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다. 하여 세계사는 카놋사의 굴욕이니 아비뇽 유수(幽囚)니 하는 사건들이 보여주는 대로, 때로는 성(聖)과 속(俗)의 다툼으로 점철되기도 하고, 때로는 속(俗)의 세력을 등에 업은 성(聖)끼리의 투쟁, 혹은 그 반대의 경우로 뒤덮이기도 한다. 교회사에 가득한 수많은 이단 논쟁의 저변에는 언제나 세상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성직자들의 밥그릇 싸움이 깔려 있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소설 장미의 이름이 전개되는 시대적 배경은 이러한 성과 속, 성과 성, 속과 속의 반목과 투쟁이 아비규환을 이루던 14세기 초반이다. 요즘도 크게 다를 것 없지만, 이 시기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이 진리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직 무엇이 진리가 되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하냐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동일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나 도미니크 수도회, 혹은 베네딕트 수도회가 서로 틀렸다며 입에 침을 튀긴다 하여 이상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 죽어도 세상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은 하지 않는단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추어 둔 속셈이고, 다툼의 주제는 언제나 그리스도니 하나님이니 하는 추상적인 문제들이다.
그 본업이 기호 논리학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기독교의 이런 현상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의 언어라는 것도 광의의 기호라고 할 수 있을 것인 바, 도대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기호가 의미하는 본질이 무엇이길래 그들은 그토록 밥그릇 다툼에 혈안이 되어 있는가? 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기호가 기독교인들에게만 점령되면 미움이나 전쟁을 의미하는 기호로 전락하는가? 사랑이라는 기호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혀끝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삶과 몸에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기호와 의미, 외포와 내연이 일치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다음과 같은 말로 대미를 장식한다.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 장미라는 말은 장미가 아니다. 그것은 예로부터 우리에게 아름다움으로 존재해 온 그 무엇이다. 그러나 지금 소설가 곁에 남은 것은 실체로서의 장미가 아닌, 영락한 이름만의 장미, 쇠락한 기호로서의 장미뿐인 것이다. 여기 장미라는 말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진리나 사랑 따위로의 치환이 가능하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은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 본질은 죽고 기호만 살아있는, 의미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 소설이 매우 딱딱할 것이라거나, 무미건조하게 재미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라는 면에서도 압권이다. 우선 이 소설은 추리소설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고, 그것도 연속되는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스토리로 전개되기 때문에 한 번 손에 책을 잡으면 쉽게 놓을 수가 없을 정도다.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 뺨치는 솜씨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소설은 기독교의 주류 정통들이 세워놓은 교회사의 이면을 들여다 보게 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슨 역사나 그러하겠지만, 모름지기 역사란 전쟁에서 이긴 자의 자기 합리화 내지는 자기 포장의 산물이라 하여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후세를 사는 사람들은 역사를 읽을 때 그 정통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것은 반론청구권이 전혀 없는 일방적 자기 주장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관(史觀)이 중요하고, 행간을 읽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에코의 해박함은 소설을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흔들게 한다. 어디서 그런 자료들을 모았는지 불가사의하기가 짝이 없게 만든다. 초대 교회의 영지주의 이단들, 말시온이나 발렌티누스 등을 부활시켜 정통의 도그마에 대항하게 하는 모습은 정통 기독교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또한 교황의 사절단이라는 그 시대 최고의 신학 지성들이 모여 토론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야말로 고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본론과 상관 없는 지엽말단을 붙잡고 말싸움 내지는 인신공격을 하는 꼬락서니들은, 저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 이전에, 이성적인 인간인가에 대한 회의를 갖게 만든다. 에코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 속에 있는 권력에의 추한 의지를 마음껏 씹으며, 독자로 하여금 무한한 카타르시스의 세계로 몰입케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이런 재미만을 추구한 것이라면 에코의 의미는 반감된다. 에코는 독자로 하여금 재미있게 글을 읽도록 만들지만, 단지 킬링 타임을 위하여서만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이 소설 역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를 찾고 있고, 나름대로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인 동시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과학적 사고를 하는 진보적인 사람이다. 한 마디로 상당히 괜찮은 인물인 셈이다.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스토리의 전개가 이어지면서 독자는 너무도 쉽게 주인공에게 동화된다. 그리고 그의 활약에 박수를 보내고, 그의 냉철한 이성에 감동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게 병이다. 윌리엄에게 감동하면 에코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지성과 선의 상징인 윌리엄이나, 미망과 악의 화신인 듯 그려지고 있는 요르게나 따지고 보면 오십보 백보에 불과하다.
“이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다.”
소설 초반부에 나오는 이 명제를 끝까지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에코의 의도를 제대로 짚어낼 수 있다. 윌리엄은 무엇에 대한 그림이며, 요르게는 또한 무엇의 거울인가? 그들은 이 세상의 선과 악, 정(正)과 반(反)의 상징이다. 세상은 어디서나 이들 둘의 반목과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선은 악이 있음으로 선일 수 있으며, 정은 반이 있어 비로소 정인 것이다. 이 세상을 통치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이들 둘을 적절히 대립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사실 선과 악은 양분될 성질의 것이 아닌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둘을 양분하여 선한 쪽에 자신을 위치시키고자 한다. 하여 사람들은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자신을 내던지고, 거기서 고민하며 고통한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도 이와 비슷한 화두를 던진 바 있다. 모비딕은 악의 화신이요, 그 고래를 쫓는 에이헙 선장은 선의 상징이다. 하지만 에이헙은 끝내 모비딕을 죽이지 못한다. 때로 가끔 선이 악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어 사람들을 고무하지만, 이것은 악의 전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생각해 보라. 싸울 때마다 지는 싸움이라면 누가 또다시 그런 싸움에 빠져들겠는가 말이다. 사기 도박을 벌이는 사람들도 이런 수법에는 이미 도가 텄다. 판돈이 적을 때는 져주고 큰 돈이 걸렸을 때 이기는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돈을 잃으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잘만 하면 이길 수도 있다는….
에코 역시 윌리엄 대 요르게의 대결을 윌리엄의 승리로 매듭짓지 않는다. 그런 구도는 동화 작가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어른은 삶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동화는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한 것. 그러나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은 냉혹하다. 에코에게 있어 현실은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수도원 안의 살인 사건 역시 정치적으로 유야무야 매듭될 수도 있었다. 이런 결론은 우리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보는 답안이다. 그러나 대중은 이런 결론을 원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진실´이 밝혀지기 원하고, 그래서 악한 사람, 잘못한 사람은 응분의 처벌을 받기를 원한다. 윌리엄은 사람들의 이런 소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진실´을 밝혀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윌리엄의 내면에 과연 진실 그 자체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윌리엄 안에는 정말 그 추한 권력에의 의지가 없었단 말인가?
국민들의 알 권리를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오늘날의 각종 언론들은 정말 진실 그 자체에 목말라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언론 역시 진실을 빙자하고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장하여 자신의 권력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족속에 불과하다. 에코가 주목하는 것은 요르게라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함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얘기하지 않아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에코는 윌리엄의 시자 아드소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나는 윌리엄 수도사가 무엇을 구하러 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당신께서도 몰랐는지 모른다.”
그랬을 것이다. 윌리엄도 자신이 무엇을 구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느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를 주절대던 세례 요한이 당시 유대의 분봉왕 헤롯의 스캔들을 비판하다 감옥에 들어간 후,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질문하던 말.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했던 것처럼, 윌리엄 역시 끝까지 자기 삶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끝내면서,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임을 중얼거린 아드소. 그리고 그의 입을 빌어 얘기하는 에코마저 윌리엄이 무엇을 구했는지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안다. 윌리엄 수도사의 집착과 미망을….
인간들의 선악간 투쟁은 원튼 원치 않든 생명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윌리엄과 요르게의 투쟁은 수도원의 보물, 도서관을 박살내고 만다. 진리를 수호하고 진실을 밝히려는 싸움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일 수도 있는 보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든지 또한 수많은 세월동안 하나님을 그리면서 산 사람들의 주옥 같은 삶의 기록들을 불태우고 마는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아무 것도 모르는 수도원 사람들과 또 그 수도원으로 인해 생계를 이어가던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까지 깡그리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에 매달린 사람들의 행태는 언제나 사람들을 죽인다. 장미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운 향기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하지만, 장미의 이름은 그 이름에 집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언제나 주검의 악취를 풍기는 것이니.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듦은 당연하다.
이 세상은 이름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지배한다.
by http://www.edu.co.kr/kwank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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