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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김한룡 : <전봉준>

출판사 : 상서각 / 출판일 : 1995년 4월 1일 / 페이지수 : 256

전봉준은 동학 혁명을 일으킨 ´녹두장군´으로, 전라도 고부군에서 1855년에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자라난 전봉준이 ´녹두´라는 별명을 듣게 된 것은 작은 체구 때문이었다. 녹두처럼 작다고 그런 별명이 붙여지고, 뒷날에 무예가 뛰어나 ´장군´이 덧붙여진 것이다.
1890년, 전봉준은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 이 무렵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터무니없는 세금을 징수라고 저수지를 새로 만들었다는 핑계로 물세를 받는 등 수
탈을 자행하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이에 항의 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1894년, 전봉준은 분노한 농민들과 동학 교도를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관아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파직하고 조사관을 내려보냈으나, 조사관은 동학 교도를 잡아들이는 등 행패를 부렸다.
전봉준은 동학교도 1만 명을 모아 혁명군을 이끌고 부근 일대와 정읍·흥덕·고창 등을 치고 전주성을 함락했다. 한때는 조정과 화해도 하여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 진정 기미를 보였으나, 동학군 토벌을 빙자하여 들어온 청·일 양국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동학군이 다시 집결, 10만 대군이 움직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신식 무기를 당해 낼 수가 없어 패하고 전봉준은 체포되어 마흔한 살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전봉준은 혁명을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민족의 자주 정신을 일깨운 민중의 지도자로 큰 몫을 해냈다.
나도 이젠 전봉준 같은 리더쉽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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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녹두장군 전봉준
나는 전봉준 장군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마음이 아팠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여 동학군을 일으킨 전봉준 장군이 한 배신자의 고발로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화도 나고 나도 안타까웠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랫말이 아주 슬프게 느껴졌다.
전봉준 장군은 어릴 때 워낙 작아서 별명이 녹두였다고 한다. 이웃 아이들이 이름을 놔두고 ˝얘, 녹두야.˝라고 부르며 놀려도 화를 내지 않고 싱글벙글 웃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대담했기 때문에 커서 농민군 대장이 되었을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어릴 때, 친구의 아버지가 아무 죄도 없이 관가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온걸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때에 전봉준은 비록 몸은 작았지만 비장한 각오로 무술을 배우며 몸을 단련했다. 그래서 같은 또래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힘센 아이가 되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탐욕스럽고 포악한 고부 군수에게 항의하다 곤장을 맞고 죽음을 당하였다. 곧 동학교에 들어간 전봉준은 고부 지방의 접주가 되면서부터 농민 운동을 이끌었다. 아버지를 죽게 한 고부 군수가 여전히 농민들을 못살게 굴었다. 고부군수의 횡포가 점점 심해져서 농민뿐만 아니라 부잣집 사람들도 살아 갈 수가 없었다. 농민들이 군수에게 진정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전봉준은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나쁜 탐관 오리들을 몰아내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일어섰다.
나는 녹두장군이 앞장서서 탐관 오리들을 쳐부셔 없애는 장면에서는 박수를 쳤다. 그렇지만 그 전에는 군수와 관리들이 잘못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걸 생각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나라를 다스리는 공무원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다. 모두가 좋은 마음으로 합쳐 나라가 잘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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