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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털리 부인의 사랑 |  | |
| 로렌스 : <채털리 부인의 사랑>
역자 : 이우석 / 출판사 : 하서출판사 / 출판일 : 1991/8/1 / 페이지수 : 408
한 사람에 대한 오해는 편견을 낳고, 편견은 또 그 사람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전파한다. 흔히들 알고 있는 성문학의 대가, D. H. 로렌스. 나는 사람들이 왜 그를 일러 그렇게 평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란 책은 1927년에 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완전 무삭제판으로 햇빛을 보게 되기까지는 장장 40년이 넘는 세월의 흐름이 필요했었다. 이름하여 외설스럽다는 것이다. 과연 이 소설이 그처럼 자극적이고 말초신경적인 쾌락을 추구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독자들이 행여 이런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읽는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동네 비디오점에서 쉽게 구해볼 수 있는 동명의 영화를 본 사람은, 그것이 로렌스가 그토록 싫어하던 상업적 자본주의의 돈벌이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회는 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로렌스를 금서로 묶어두었는가? 그것은 그가 기성의 체제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귀족이라는 상류 사회를 향하여, 그리고 산업자본주의를 향해 일취월장 발전하고 있는 영국의 기계문명을 향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였기 때문이다.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클리포드 채털리와 젊고 아름다운 그의 부인은 비유에 불과하다. 성 문제를 소재로 인간의 존재 의미와 사회의 나아갈 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을 뿐, 이 소설은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에로문학도 아니고 더구나 외설도 아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을 꼽으라면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이 소설과 관련지어 얘기한다면 나는 인간만 옷을 입는다는 사실을 들고 싶다. 동물들은 옷을 입지 않는다.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 산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걸쳐입은 옷가지들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 시체가 된 다음에도 벗지 못한다. 그것이 단지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한 이유만인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벌거벗은 몸에 대한 부끄러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으로서 벌거벗고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사람들은 어찌하여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이성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의 사람됨이 육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성적일 때, 인격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존재하는 모든 동물적인 요소들, 먹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기능들은 가능한 한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옷을 목 아래로만 입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머리 즉 이성은 감추고 싶지 않은 인간만의 자랑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는 옷을 입지 않는다. 머리가 옷을 입는 경우는 강도짓을 할 경우나 아니면 강도짓 하다 들켜서 TV의 카메라가 자신을 찍으려고 덤벼들 때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머리만 가지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싫든 좋든 인간은 머리와 함께 몸도 존재한다. 이 둘을 분리하면 그것이 곧 죽음이다. 몸을 좇아 사는 것이 제아무리 동물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몸 없이 살 수 없다. 사실 인간도 동물인 것이다. 동물이면 동물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누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그런 삶을 천하게 생각한다. 물론 인간이 밥 먹고 잠자는 일에만 전 삶을 소모한다면 그것도 문제겠으나, 배설하고 섹스하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문제가 심각하다. 동물적인 요소는 부끄러워하거나 끊어버릴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인류의 어떤 스승들은 섹스를 아주 좋지 않게 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 금욕 생활을 실천하고, 이러한 금욕 생활이야말로 인간을 한 차원 고양시키는 것으로 가르친다. 물론 역사에는 이러한 금욕의 가르침에 대한 반동으로 쾌락주의를 외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금욕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섹스 에너지를 머리로 돌려 그 사람으로 하여금 권력욕이나 명예욕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게 한다. 한 사람이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는 그가 성욕에 사로잡혔을 때보다 권력이나 명예욕에 사로잡혔을 때가 훨씬 더 심각하다. 뿐만 아니라 금욕주의자들의 머리에는 그가 섹스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실상은 쾌락주의자보다 훨씬 더 섹스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니 우리 모두 쾌락의 길을 걷자는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섹스에 탐닉하는 것 역시 피해는 대동소이하다. 잠깐 있다가 없어질 육체에 사로잡혀 그것만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그야말로 동물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면 무엇을 말함인가. 머리는 머리대로, 몸은 몸대로 인정하고 바라보자는 것이다. 머리를 자랑할 것도 아니고, 몸을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다.
소설에 나오는 클리포드 채털리경. 하반신이 마비되어 생식이 불가능한 인물. 귀족의 지위와 주어진 유산으로 먹고 사는 일이야 걱정이 없지만, 그래도 하는 일은 있어야 하는 법. 그는 글 쓰기에 몰두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필명을 얻게 되고, 명예와 아울러 수입도 늘어간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유산인 광산을 경영하는 솜씨 역시 탁월하다. 이 클리포드의 모습이 20세기 초반의 영국 사회를 상징한다. 로렌스가 바라본 당시의 영국은 산업 자본주의가 나날이 발달하고 기계문명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이성과 지성에 바탕을 둔 삶의 건전성에 있어서도 영국은 세계의 일등국이었다. 그러나 로렌스는 명예와 부,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들이 배설하는 엔트로피에 주목한다.
그래, 너네들이 추구하는 그 성공이란 것을 손에 쥐었다고 하자. 그러면 무얼 할 것인가? 그래봤자 하반신 마비의 삶인 것을…. 광산을 개발하기 위하여 수십년된 삼림을 마구 파헤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로 인한 생활의 윤택이란 것이 따지고 보면 하반신을 잘라내고 휠체어에 앉아 유지하는 삶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하는 것이다. 명예를 얻기 위한 글 쓰기 역시 동일하다.
채털리경의 부인 콘스탄스는 따라서 성공 이면에 자리하는 생명의 빈곤을 상징하고, 윤리와 도덕이라는 인간의 이성 아래 신음하는 생명의 아픔을 드러낸다. 부와 명예, 잘 절제된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혼돈과 공허가 밀려오는 걸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는 광산 노동자들이 보기엔 행복한 고민이라 빈정거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코니(콘스탄스)에겐 심각한 고민이고 갈등인 것이다.
갈증은 물을 구하고, 구하는 자는 마침내 찾아 얻는다. 이성이 아무리 막아도, 윤리가 아무리 엄포를 놓아도, 목마른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물이 누구의 ´소유´냐를 따지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것을 따질 기력도 여유도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 도덕과 이성은 목마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의미 있다. 도덕적 삶은 배부른 사자가 지나가는 토끼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일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윤리 도덕은 배고픈 사자에게 살생을 금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금령인 셈이다.
육친이 불화하게 되자 효도니 자애니 하는 게 생겨났고, 나라가 어지럽게 되니까 충신이란 게 나오게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도덕율은 이미 그 이전에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깨어졌음을 전제한다. 한 번 깨어진 관계는 효도 따위로 회복되지 않는다. 문제는 관계의 회복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있는 한, 그것은 깨어진 관계에 불과하고, 깨어진 관계의 틀 안에서는 무엇을 해도 진정한 효도가 아니다. 효도를 버릴 때 관계가 회복된다.
코니를 산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산지기 멜러스가 아니다. 그것은 코니 속에 존재하는 공허며 갈등이다. 생명의 분출, 에너지의 약동은 언제나 우리 곁에 충만하다. 문제는 우리가 허상을 좇느라 바쁜 탓에 그 실상을 놓친다는 데 있다. 철저하게 절망하고 처절하게 공허한 사람만이 신분과 돈과 명예와 도덕을 뛰어넘어 멜러스를 만나게 된다.
클리포드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은 코니에게 편안함을 선물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우리가 그것을 지킴으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의 생명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 없는 윤리, 몸 없는 머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주검이고 쓰레기다.
그러나 생명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리 간단치 않다. 사방으로부터 회유와 협박, 비웃음과 핍박이 밀려든다. 목숨을 던지는 용기가 없이는 생명으로의 여행은 불가능하다. 코니는 창세기에 나오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을 연상케 한다. 남편이 후사 없이 죽고 또 당시의 관습을 따라 형의 후사를 이으려고 형수와 동침한 동생마저 죽은 다음, 세월이 흘러도 막내아들을 자기에게 주지 않는 시아버지 유다를 속이고,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동침한 여자 다말. 이런 용기가 없었다면 그는 예수의 족보에 끼이지 못했을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외설이 아니다. 흔하디 흔한 불륜을 다루는 소설도 아니다. 인간의 모든 자랑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 모두를 넘어서는 존재의 기본,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외설은 언제 생기는가? 그것은 사고가 육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할 때, 그리고 육체가 정신을 증오하고 반항할 때 비로소 외설이 생긴다.”
로렌스의 말대로라면, 과연 오늘날 외설스럽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옳다. 현대야말로 심각한 외설의 시대다. 머리로 사는 사람은 머리로만 살고, 몸으로 사는 사람은 몸으로만 산다. 이것이 외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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