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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별곡
고려가요 : <청산별곡(靑山別曲)>

편자 : 박재수 / 출판사 : 동진음악출판사 / 발행일 : 1996/3

노란 옥수수알 같은 아파트 전등들이 하나둘씩 꺼지고 모두가 잠든 겨울 어느 어두운 밤.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불어대는 바람이 차디찬 빗방울까지 싣고 와 안 그래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소녀를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다. 소녀는 잠시 후 부엌에 꾸리한 색깔의 표지로 싸인 책 한 권을 들고와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분침이 몇 바퀴를 돈 뒤...아직도 온기가 남은 길고 꼬불꼬불한...
왠지 고양이의 뇌를 떠올리게 하는 하얀 건더기가 떠있는 새빨간 액체를 들이킨다.
소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괴기스러운 미소...그리고 갑자기 주문을 왼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바로 독후감 걱정에 잠 못 이루다가 몰래 라면을 끓여먹고 책을 읽는 내 모습이다. 요상한 주문은 바로 그 유명한 고려가요<청산별곡>...언니 책상에 있는 책에서 발견한 청산별곡을 읽은 것이다. 고어를 모르는 나였지만 다행히 책에는 해석본도 나와 있었고 책의 해석본을 나름대로 더 자연스럽게 고치고 나니 난 청산별곡이 나 역시 부를 수 있는 노래라는 것을 알게됐다. 좋은 문학작품은 당시의 현실을 비추면서도 후세의 사람들도 그 작품에 담긴 주제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던데...
그렇다면 청산별곡은 명작 중에도 명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청산별곡의 화자는 몽고족의 침입과 무신란 등의 세파를 이겨내지 못해 청산으로 향하는 고려인만은 아니었다.
수시로 바뀌는 교육제도와 기반을 잃고 흔들리는 학교, 주체성 없는 문화의 소용돌이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십대가 느끼는 신세계에 대한 갈망은 이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달랬을 고려인의 그것과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 청산별곡의 청산은 참 특이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청산은 분명 현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던 주인공이 향한 천국이다. 재미있는 것은 머루나 다래를 먹더라도 청산에 가서 살겠다던 주인공이 고독한 하루를 보내고 나서는 더 이상 청산을 자신이 그리던 이상향으로 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마치 학교와 집을 오가며 인형처럼 움직이는 자신이 싫어 가출했다가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바깥세상의 암흑에 몸서리치는 아이처럼. 자신의 친구라 생각했던 새가 낮이 되자 다시 속세로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고 허무함에 산을 내려와 버리는 주인공은 마음 둘 곳 없이 떠도는 우리의 영혼을 떠올리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더니, 예전처럼 몽고인들이 쇠고기 옆구리에 차고 말 타고 쳐들어온 것만 아니지 확실히 나와 내 또래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전쟁이다. 어쩌면 그 때보다 더욱 더 참혹할지도 모르는. 친구도 믿지 않는 입시 전쟁,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생존전쟁.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지니고 있던 삶의 여유마저 잃어버린 가여운 족속이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가슴 속에 하나의 청산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짚 태우는 냄새가 배인 농촌을, 또 어떤 사람은 생기 넘치는 대도시의 거리를 그릴 것이다. 하지만 난 청산은 꿈꾸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청산에서 허무함만을 느낀 채 다시 해초와 굴, 조개를 먹는 바다를 꿈꾼다. 하지만 바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꿈에 부푼 힘찬 것이 아니다. 청산에서 느낀 허무함을 알고 바다 역시 그 허무함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을 주인공은 깨닫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는 그는 사슴탈을 쓴 광대의 해금 켜는 소리도 듣고 독한 술을 보고 취하기도 하며 이상향을 찾는다. 술에 취한 주인공의 말투는 처음의 비장함을 찾기는 힘들지만 오히려 나른해진 그의 모습은 더 이상은 이상향을 믿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청산을 맘 속으로 그리기만을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상에 진리가 없듯이 만족이라는 것도 있을 수 는 없다. 만족하는 동시에 사람은 더 이상의 발전은 꿈꿀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발전할 게 없으니까.
나 역시 하루에도 열 두 번씩일탈을 꿈꾸고 또 현실에 대한 미련에 한숨만 쉰다. 하지만 난 청산별곡의 주인공처럼 모든 것이 갖춰진 꿈의 세상만을 찾아가는 것보단 내가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나가는 게 더 값진 일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아직까지 인류가 청산으로 다 숨어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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