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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의 돼지
이문열 : <필론의 돼지>

출판사 : 열림원 / 쪽수 : 370

유난히 신호가 바뀌지 않는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 누군가가 길을 건너기 시작하면 모여 있던 사람들 전체가 우루루 움직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른바 군중심리라는 것이다. 군중심리는 역병과도 같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생각´ 대신 ´집단의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런 집단 심리 상태는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쉽게 폭발해 버릴 수 있다. 홍수로 불어난 급류에 휘말린 것처럼, 그렇게 폭발한 흥분상태에서는 도저히 이성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집단 심리상태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 스스로 기가 막혀 하기도 한다. 설령 그가 지극히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집단의 힘이라는 것은 거대하고 무서운 마력이다.
필론의 돼지에서 제대 군인들은 처음에 부당한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다. 한 제대병의 항거는 무력하기만 하다. 그의 항거가 비록 영웅적이고 투사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아무 힘도 없는 항거는 거기까지가 한계일 뿐, 상황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제대병들이 힘을 얻은 것은 그들이 ´집단´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였다.
그런데 그들이 집단의 힘을 깨닫게 되는 계기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제대병들에게 그들이 하나의 집단임을 알려 준 목소리 그 목소리는 집단의 힘이 가지는 커다란 특징인 선동성과 익명성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단지 모여 있는 것만으로는 힘이 되지 못한다. 모여 있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인식시킬 수 있어야만 비로소 현실적인 능력을 가지게 된다. 집단의 힘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 과정은 필수적이다. 이 과정이 바로 선동이다. 작품에서 이 기회는 한 번 더 있었다.
백골섬에서 왔다는 제대병이 억압자들을 위협할 때에 무언의 선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배신함으로써 집단의 힘은 발휘할 수 없었고, 결국 성공한 것은 얼굴을 숨긴 목소리의 공이었다. 힘이 없는 구 누군가가 백골섬 제대병과 대등한 일을 해 낼 용기를 얻기를 얻기 위해서는 익명성이라는 방어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발휘된 집단의 힘으로 제대병들은 상황을 역전시키는 데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 또한 증오심과 흥분에서 비롯된 부당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집단의 힘이 가지는 취약점은 바로 그 무비판성에 있는 것이다.
그 힘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어떤 대의도 지니지 못했고 ,혹은 처음에 가졌던 대의마저 격앙된 흥분 속에서 잃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경우 집단의 힘은 그것을 이끌어 줄 머리가 없어 우발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완전히 통제 불능이 된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거대한 힘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지도 모르는 채, 그저 짓밟을 뿐이다. 그 쪽에 흐르는 물은 더럽고 탁하다.
그래서 아직 이성이 온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난장판을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탁류에서 발이 빼어 고고하게 몸을 피한다. 어쩌면 자신의 이성으로 그 자리를 정돈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흥분한 집단을 진정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설혹 그가 집단을 이끌던 머리였다 하더라도 일단 그 집단이 통제선상에서 벗어나면 다시 고삐를 쥘 수가 없다. 그런 곳에서 제대로 된 이성은 할 일이 없다. 그는 자신만이라도 그 소란에 휘말리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도피해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필론의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도 혼란의 와중에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홍´뿐이었다. 그는 처음에 홍을 경멸했지만 마지막 모습은 결국 홍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상황을 보는 눈이 조금 다를 뿐, 그저 관망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런 상황에서 지성의 역할이란 대체로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자괴감만 느낄 수 있을 뿐인가? 이런 상황에서 지성을 가졌다는 사실은 오히려 더 가혹할지도 모른다. 돼지는 무지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은 자신의 존재 의의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모습을 파악할 지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면 근본적으로 돼지와 똑같은 존재 가치로 전락하고 만다. 필론의 돼지. 더없이 혼란한 무비판의 시대에서 힘을 갖지 못한 지성의 자기 고뇌의 형상화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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