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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무의 미학 |  | |
| 무라카미 하루키- <허무의 미학>
물론, 지금도 그다지 나아졌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 당시엔 좋은 책에 관해 정말로 무지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막연하게도 단순히 신문에 그럴싸하게 소개된 작가나 작품을 골라서 읽었다. 그리고 거기엔 ´8년간의 베스트 셀러´라는 타이틀을 가진 <상실의 시대>가 끼어 있었고, 그걸 쓴 사람은 아주 생소하게도 일본 사람이었다. 나는 그 타이틀이 가진 뉘앙스가 너무나 특이하고, 산뜻하고, 신선해서, 당시 서점으로 달려가 <상실의 시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하루키 소설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때 나는 아마 중학교 2학년이지 않았나 하고 기억된다. 내가 그 때부터 계속 해서 하루키의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혹은 일체감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소설은 항상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건 꽤나 멋진 일이다.
작가의 맑고 순수한 눈을 통해 바라본 회색빛의 허무한 세계를, 읽는 사람도 자기의 마음 한편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다. 하루키 소설의 여주인공 또한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의 소설엔 언제나 솔직하며,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다혈질의 소녀가 항상 꼭 등장한다.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가 그렇고, <댄스 댄스 댄스>의 ˝유키˝가 그렇다. 그녀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들을 매우 유쾌하고도,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해결해 나간다. 특히, <상실의 시대>에서의 ˝미도리˝는 그저 주인공의 주변에서 머무르며 끌려 다니는, 여주인공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삶을 상징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상징된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도리˝와 대조를 이루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여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미도리가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순종적이고, 청순하면서도, 병약한 태도로 요양소라는 ˝비현실적 세계˝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얼마 전에 읽었던 <마의 산>에서의 모티브와 매우 흡사하다. 실제로 우리는 하루키가 유럽계 소설, 특히 독일계 소설의 장면을 비슷하게 패러디하여 자신의 소설 속에 채용하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해 낼 수 있다. 그것은 작가의 노골적 암시가 있기에 가능하기도 하다.
그 암시란 것의 예를 들자면, 독일어 동사표를 열심히 외워 대는 주인공이 그와 비슷한 식에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는다는 식이다. 하루키가 일본에서 가장 비난 받는 부분이 무국적성 혹은 전통 의식 결여라는 점에서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흔히 그의 소설을 두고 ´인명과 지명만 아주 조금만 손보면 그대로 뉴욕 뒷골목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고들 한다. 하루키 역시 젊은 시절, 일본적인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 소설은 전혀 읽지 않고, 오로지 서양 소설만을 구해 읽었다고 담담하게 인정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그의 무국적성이 오히려 그에겐 잘된 일인 것 같다.
결국 그는 일본적인 것을 잃었지만, 다원적인 감각과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코 피츠 제럴드˝를 얻었다. 피츠 제럴드가 없었다면 아마 하루키도 없지 않았을까? (하루키는 그의 처녀작의 제목을 피츠제럴드의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서 힌트를 얻어 <바람과 노래를 들어라>라고 정하기도 한다.) 내 짧은 소견으로 보면, 소설이란 궁극적으로 한, 국가의 정신을 대표한다기보다는 인류 전체,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부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무국적성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문제라면 그가 너무 늙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데뷔 시절이나, 상실의 시대 때만큼을 이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이젠 그의 소설 전체에 골고루 묵어 있던 회색빛 허무함이 더하고 더하여 예전의 팽팽한 긴장감과 흡인력을 깨뜨리고 있다. 거기에 한결같은 ´일본식의 야릇한 죽음의 미학´에 염증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조금씩 늘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렇게 느낀 것일까? 최근 그가 선보인 <스트푸니크의 여인들>에서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닌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병적으로 자기 안으로만 파고들지 않고 조금 거리를 두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성공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처음 대했을 때, 하루키의 소설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아를 찾아 고민하는 주인공이랄지, 끝없는 독백, 단편 영화 같은 분위기, 그리고 어느 영화에서는 하루키 소설에 관한 언급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왕가위 영화 같은 분위기를 되찾았으면 하고 바란다. 언젠가 그가 단편집을 내놓으며 한 말처럼 ´꼭꼭 숨겨 놓았던 보석함을 여는 기분으로´ 그의 어딘가에 숨어 있을 산뜻한 감각을 다시 열어 놓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의 소설에서 변하지 않는 깊이처럼 그의 개성도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
by http://www.edu.co.kr/kwank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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