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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의 포도 |  | |
| 존스타인벡 : <분노의 포도>
역자 : 김유순 / 출판사 : 육문사 / 출판일 : 2001/10/1 / 페이지수 : 622
이 책은 1902년 캘리포니아에서 출생해 1962년 노벨상을 수상한 존 스타인벡의 대표 장편소설이다. 광막한 미국 대륙을 중고차를 타고 횡단하며 이들의 현실에 속에서 울고 웃고, 사람을 죽이고 또는 서로 돕는 인간미가 풍부한 빈민들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극을 그렸다.
그들의 분노는 악에 보복하고자 하는 악이 아니라, 시련에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힘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잘 살기를 원한다. 전자의 욕망은 사람들의 본성으로써 인정되는 반면, 후자는 ´이기심´이라는 추한 속성과 연결되어 비난받곤 한다. 두 욕망을 추구하는 주체로서가 아닌, 바라보는 객관자의 입장에서 이것들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나를 각각의 상황 속의 주체라고 상정해 볼 때, 그것은 그리 쉬운 문제만은 아니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위의 두 욕망이 부딪힘으로써 생기는 갈등, 그리고 더욱 절실한 필요에의 충족을 바라는 집단이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
오클라호마주의 소작농들에게 땅은 땅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이다. 그들에게 땅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혼과 일치된 신성함, 그 자체인 것이다.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끌려나온 그 순간에 돌아가신 거야. 노인은 그 땅이었고, 그것을 그 자신도 알고 계셨지요.˝
그러나 땅을 떠나는 그들만 불행한 것도 아니었다. 땅 또한 불행해진 것이다. 땅은 ´땅을 알지도 소유하지도 신뢰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트랙터에 앉은 로봇에 의해, 규칙적으로 아무 정열도 없이 강간을 당할 뿐이었고, 더 이상 자신을 어루만질 인간을 잃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작농과 땅과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이 사랑하는 대상간의 관계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의 감정은 이성 못지 않게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 그런데 기계의 발달은 ´효율성 증대´ 내지는 ´편리함´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을 사랑하는 대상과 분리시킨다. 즉, 인간이 그의 감정을 쏟을 대상을 잃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감정 소멸을 초래하여, 이 세상을 인간 아닌 인간들의 집단으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트랙터라는 기계문명의 소산은 불행의 씨앗인 것이다.
그런데 작품에서는 그 씨를 뿌리는 실체를 단지 ´거대한 그 무엇´으로 암시할 뿐이다. 소작농들은 분노하고 좌절하는데, 무엇이, 왜, 그런 비극을 일으키는 것인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단순히 한두 사람의 악의라고 하기에는 너무 필연적이고, 거센 그것을 역사의 흐름으로 단정짓는 것은 무책임한 결론일까.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흐름이 인간의 ´효율성을 통한 경제성 획득´이라는 목적 달성에의 성급한 욕구에 의해 재촉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작농들이 그들의 과거를 태우고 떠날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캘리포니아에 대한 꿈,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여기완 다를 게다. 일자리도 많고, 또 뭐든지 잘 되고, 푸르고 조그만 하얀 집의 둘레에는 오렌지나무가 자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소망은 서부로의 이주 과정의 험난함이 암시하듯, 견디기 힘든 고통에 의해 산산조각 난다. 캘리포니아는 지상의 낙원 같은 모습으로 이주자들을 맞지만, 이 환희의 광경은 조드네 가족이 과거에 겪었던, 그리고 앞으로 겪을 고난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들은 너무도 아름다운 열매를 향해 힘겹게 손을 뻗어보지만, 그것이 실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신기루이고 허상일 뿐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돌아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계속되고, 그들의 기대, 희망 역시 계속된다. 주저앉지 않는 인간. 여기서 인간의 강인함을 본다.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가 뒤로 미끄러지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고작 반 발 짝일 뿐이며, 완전히 한 발 짝 후퇴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극한의 고통에도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강인한 모습에서 자부심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이 자부심은 허황된 오기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유지시켜 주는 든든한 받침대로써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머리도, 감정도 없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은 분노를 키운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악´에 보복하고자 하는 ´악´이 아니라, ´시련´에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힘´을 상징한다.
˝공포가 분노로 바뀌는 한 파국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시련을 안긴, 더 잘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캘리포니아인들은 비난받아 마땅한 탐욕가들인가.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욕망과 오클라호마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은 서로 성격을 달리한다. 캘리포니아 인들은 생존의 위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서 그 이상의 것, 즉 삶의 질의 개선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오클라호마 인들의 생존욕구와 비슷하게, 아니 더욱 큰 무게로 바라봤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시각으로 보고,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그들의 행위를 범죄로 판정한다. 그러나 그것의 원인을 그들의 악함으로 보는 것보다 그들, 아니 인간의 태생적인 어리석음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할 듯 싶다.
그 누구도 자유스러울 수 없는 본능적 이기심으로 말이다. 이 작품은 로저샨이 굶어 죽어가는 사내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으로 끝난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산을 한 로저샨. 그녀의 어머니처럼 강인하지 못했던 어린 그녀가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에 힘없이 쓰러지지 않고, 더욱 강인한 모습으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장면은 생명력의 극치를 이룬다. 분노한 그들이 택한 행동은 세상에 대한 미움, 세상을 향한 저주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탄생을 위한 사랑인 것이다. 그 장엄함과 숭고함은 세상을 휩쓰는 태풍이 될 수는 없어도, 불굴의 생명력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교보문고´ 독자 서평 전재-
by http://www.edu.co.kr/kwank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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