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어른도 길을 잃는다 |  | |
| 박정요 : <어른도 길을 잃는다>
출판사 : 창작과비평사 / 출판일 : 1998/8/20 / 페이지수 : 352
<어른은 자라서 무엇이 되나>
짐짓 너스레를 떨어야겠다. 서평이란 일종의 독후감인지라, 딱딱하게 분석하고 칼질하는 것보다는 그냥 편히 옛 숙제하듯 이야기하고 싶다.
작품은 팔 남매의 일곱 번째 막내딸의 시선으로 주변을 그려나간다. 재미있는 사건들과 섬세한 관찰을 통해 전통적인 가부장적 농촌집안과 그 주변 사람들이 자연의 풍광과 더불어 천천히 화폭에 담겨진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엮어져 가는 가족관계와 주변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지고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동학혁명과 6.25의 비극이 고개를 내민다.
소녀는 비록 전통적 질서에 숨막혀 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내부를 긍정하고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일찍 체념한다. 아직 어린 소녀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 너머 어른다움에 대한, 그것은 완성되고 온전하리라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차츰 시간이 흐르며 무너지고, 중학생이 되었지만 아직 이해 못하는 이념과 역사의 모순이 급격히 가족이란 울타리 내에 현실화되며 터져 나온다. 하나의 우주로서 믿었던 아버지를 둘러싼 비밀이 드러나며, 그로 인해 아버지 스스로가 침몰하면서 소녀는 성장과 더불어 절망에 봉착하게 되고 방황 끝에 마침내 희망을 건저 낸다.
위처럼 단순하고 짧은 설명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한 사건들이 유채빛으로 물들어 펼쳐지는 것이 이 소설이다. 책을 조금만 읽어 가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소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1인칭 시점이다. 헌데 분명히 10살 내외일 소녀의 시선은 때때로 영악하도록 성숙하다. 이는 소설 마지막까지 아주 독특한 독자와의 싱크로나이징이다.
소녀가 성장하며 그 앞에 진실들이 베일을 벗듯, 잠재되어 있던 읽는 이의 정신이 차츰 무관심과 망각을 벗어 현실을 각인하게 만들고, 닿으면 화들짝 놀라는 양심의 속살을 드러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앙증맞은 소녀는 실은 10살배기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다. 혜안을 갖춘 작가는 이미 40대를 넘어서 있지만, 아직도 소녀의 심성으로, 그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시점인 것이다. 그렇기에 읽는 이는 우쭐 소녀를 내려다보다가 그만 그녀와 합일하고 흠칫 자신이 잊고 있던 순수함과 양심이 탈을 벗은 것에 놀라는 것이다.
그럼 이 소설은 계몽적인 것인가? 아아...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역사가 흐르고 이념으로 인한 갈라섬의 아픔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드러내놓고 말하는 그런 얕음은 소설에 없다. 그저 유년기의 회상과 같은 수채빛 삶이 흐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의 아픔을 놓아버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은이의 글은 마치 타임머신과 같다. 블랙홀을 너머 화이트홀로 통하는 웜홀이 있다는 과학자의 말처럼 소설에 빠져 어느새 화이트홀로 튀어나오면 거기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곳은 글밭의 주인공이 존재하는 전남 해남의 바닷가 마을만이 아니라 독자 자신의 유년시절, 유년의 공간이다.
이 소설에서 느끼는 깊은 맛은 단순히 서정적 정취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화자의 공간과 독자의 공간이, 참으로 이질적이어야 하는 각자 유년의 시공간이, 소설 속 이야기의 추억과 독자 자신의 추억이 동시에 펼쳐지는 정서의 공명성이다.
아차, 아차. 정말 이런 걸까? 혹시 나만이 느낀 주관적 감동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서둘러 고개를 돌리면 그곳엔 민들레 꽃잎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갔다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의 세계, 주체와 객체가 어우러져 만든 고유한 공간.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듯이, 나로서도 정서의 공명이 거짓이 아닌 것 같다.
화자에게 있어서, 아마도 작가의 생생한 경험인, 이 체험은 삶과 죽음에 대한 모티브로서 책 전편에 내재된다. 여기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생사의 문제, 죽음과 생명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민들레꽃에 혼이 빨려 들어간 화자의 이야기를 이해해준 사람은 ´장대 같은 긴 낚싯대를 든 노인´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의백조부(義伯祖父)인 벙어리 아닌, 벙어리 할아버지(김선태)이다. 화자를 ´검은 눈´으로 부르는 이 인물은 화자의 조부, 증조부와 함께 동학혁명의 끝자락에 서 있으며, 이념의 비극을 자신의 아들로 체험한 사람이다. 그러나 화자에게 유일하게 살아 있는 역사로서, 산 증인으로서 존재한다. 또한 완성된 인격으로서의, 완전하지는 않지만, 표본으로 나타난다. 오랜 나이에도 꼿꼿한 모습과 젊은이보다 강인한 모습으로 역사의 한 마지막을 버팅기고 서서 사람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애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는 마을 밖의 장승처럼, 시간으로나 공간으로도 언제나 마을 사람들과의 경계에 서 있다. 그리하여 애물단지일 수밖에 없던 화자와 그 경계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화자의 경험을 이해해주며 할아버지는 더욱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새가 되어 날아간 꼬막´과 같은 동화 속의 이야기나 설화적인 체험들도, 할아버지를 통해 살아있는 경험들로 화자에게 전달된다. 노소의 대화를 통해 현실의 비극과 이상의 꿈이 만나고, 역사와 현실이 만나는 짧지만 환상적인 시공간이 이루어진다. 화자의 이야기를 이해했던 할아버지의 정서는 단순히 순수함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넓은 세계,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질서, 삶만이 아닌 죽음의 세계, 현실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들이 있음을 믿고 이해해 온 그의 삶이 만들어낸 ´포용의 아우라´ 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해되지 못한다.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자신이 딛고 있는 것이 삶이라면, 새 세계는 죽음의 세계일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경험을 막연하게 죽음에 대한 경험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순간 화자는 좌절한다. 그에게 있어 그의 표현대로 ´죽음은 모욕´이기 때문이다. 어린 자신이 딛고 있는 불완전함과 제약이 시간의 연장선 너머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 그 구체적인 세계가 ´어른의 세계´라 믿었던 화자의 생각이 무너져 내린 그 폐허에 새로운 세계일 죽음도 모욕일 수밖에 없다.
화자는 자신의 조카인 ´나대´의 새 생명을 통해 희망을 얻는다. 살아 꿈틀대는 아기를 통해 화자가 얻는 이 희망은, 그러나 감히 넘겨다 보건대 작가가 자신 속에서 찾으려 하는 생명성이 아닐까? 여기에 행간을 읽어 조금 무례를 범해볼까 한다. 작품은 성장이란 시간적 연장을 통해 절망을 맛보고 희망의 부재에 도달한다. 희망으로 상징되는 새 생명의 탄생은 외연적으로는 작가가 나름대로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삶의 교훈을 전달하고자하는 장치이지만, 그것은 작가가 자신 스스로에게서 찾고 싶었던 생명성에 대한, 살아 있음에 대한 희망이다. 자신의 성찰로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쑥스러운 일이랴. 그것은 10대의 소녀가 설할 위치도 아니고 그럴 모험도 필요 없다. 혹여 새로운 세대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는 스토리에 진부함을 느끼는 독자라면 잠시 그 생각을 밀어두었으면 한다. 작가는 독자의 감수성으로 넘기고 있는 부분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독자를 믿어야 하건만 나의 무식, 용감성을 의지해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불교의 만다라가 상징하듯 수많은 세계가 서로 그물처럼 얽혀져 시공간이라는 교향곡을 뿜어내듯, 삶은 죽음과, 이상은 현실과, 희망은 절망과 이분법적인 갈림이 아니다. 작품은 이분법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 뒷면에 개체간에, 세대간에, 세계간의 이해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앞서 주장하는 얄팍함에 기대지 않는다. 그것이 한 소녀에게 흘러들었지만, 그녀가 위대한 혁명가, 위대한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기대하지 않는 기다림일 뿐.
´어른도 길을 잃는다´. 누구나 아는 사실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점을 작가는 질러 말하고 있다. 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지만 어른은 자라 무엇이 되나´.
그렇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 탈각(脫却)의 이미지가 현실 속으로 용해되어 어른 거릴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진, 불완전함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른이 되었을 때, 이제 그 희망은 어디로 흘러야 하는가.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새 세대에 대한 희망이 그래서 정답으로 제시하는 작가의 참 의도가 아니라고 감히 넘겨짚는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가 어찌 낡은 것이랴만.
따라서 새 생명은 물질이 물질을 낳는 또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세대가 낳고, 절망이 서로 어울려 희망을 낳고, 마침내 작가 스스로가 잉태한 희망이자,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자아로 탈바꿈하고자하는 본인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자신과 타인의 삶이, 더 넓게는 모두의 삶이 전일적으로 용해되어 있다.
그럼, 그럼 이렇게 철학적이기만 한 것일까? 아니다.
바닷물 위에 은빛 비늘이 얹히듯 역사는 삶 위에 투영된다. 근대사가 어렴풋이 스쳐가고 있듯이, 어른도 바라보아야만 하는 무엇인가를 유년기의 체험과 직관력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화자의 할머니, 아버지로 대표되는 인물들과 종일댁, 김선태 할아버지 등으로 상징되는 노인들은 어린 화자에게는 전설과 역사 그 자체이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들이 겪어야했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위인의 삶을 살지는 못했더라도 그들로부터 혈관 속에 역사와 민족이라는 핏물이 흐르길 작가는 낮은 목소리로 바라고 있다.
작가의 믿음을 이렇게 표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해되지 못함은 언제나 당대의 한계일 뿐, 믿음은 언제나 현실을 넘어선다.´
하아... 한숨이 난다.
이 책의 다른 평에서 늘 언급되는 것이지만, 부러 맨 끝으로 넘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책의 문체(文體)이다. 본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문체가 나에게 주는 콤플렉스에 한숨이 나게 되었다. 처음부터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이 마치 초, 중학생 때 국어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으레 교과서적이다 하면 딱딱하고 재미없음의 대명사이지만, 여기서는 좋은 쪽으로니 오해 마시길.
돌이켜보면 교과서에 실린 글들은 주옥같은 글들이 대부분이었음에도 모든 것이 암기의 대상이었던 당시로는 재미있게 느껴질 턱이 없었다. 지금 살펴보면 교과서의 글들은 정갈하고 하나같이 문장의 표현력이 출중한 것들이다. 그렇게 군더더기 없고, 표현이 다채로워 입안에서 흐르듯 읽히는 문장. 서정성이 묻어 나오고 절로 고향의 맛이 느껴지는 이 소설의 문체가 교과서 같은 전범에 속하겠구나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거기에 다른 작가들이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옛 우리말을 잘 부려씀으로서 작가의 작품에 대한 노력과 말글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작가가 끊임없이 노력한 때문이란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슬며시 들었다. 별로 글을 읽지 않는 게으름뱅이라 달리 비견할 작품은 딱히 떠오르지 않고 고 최명희 선생님의 ´혼불´과 문장의 깔끔함이 유사하단 느낌이다.
이제는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글은 하나의 생명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 생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 가는 사람이나 뭇 중생들처럼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 본다면,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쓰레기 같은 글들이 얼마나 큰 공해일 것인가. 하나의 생명이 지구 위에 빛을 던지듯 아름답고 훌륭한 글도 세상에 빛을 던지고 있다. 많은 작품 중에서 이 소설이 의미 있는 것은 그렇듯 작가가 탄생시킨 작가의 또 다른 생명력이 이 지구상에 아름다운 빛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를 포함해서 좋은 글을 읽게 기회를 주신 분들께 삼가 합장을 드리고 싶다.
(교보문고 전재)
by http://www.edu.co.kr/kwank99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