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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과 6펜스 |  | |
| 서머셋 모옴 : <달과 6펜스>
역자 : 김정욱 / 출판사 : 소담출판사 / 출판일 : 2001/6/25 / 페이지수 : 346
<이상과 현실 사이에 서서>
후덥지근한 날씨에 방안에 널어놓은 빨래들이 축 처져있다. 모기들마저도 무겁게 날다 내 매정한 손바닥에 부딪쳐 떨어진다.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앞 이마가 유난히 무겁다. 삐질삐질 흐르는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에 온갖 먼지들이 달라붙기라도 한 것인 양, 온 몸이 무겁다. 가벼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때는 이처럼 무거움, 나를 끌어내리는 무언가가 강렬할 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탈을 꿈꾸었다. 일상의 굴레를 벗고 날아오르는 꿈... 하지만 끈적끈적한 욕망의 몸을 가지고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회의 또한 만만치가 않다. 자유라는 것은 한계지어졌을 때만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달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면 그림자가 너무 길다.˝
사월 어느 날 밤에 수첩에다 적었던 글귀인데, <달과 6펜스>라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떠올랐다. 자다가 깨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서늘한 달빛을 온몸으로 맞을 때, 차고 기울어지기를 반복하는, 늘 죽어가고 그럼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달을 떠올릴 때, 그것은 신비한 여신이고 영원불멸한 꿈일 것이다. 그런 달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 가득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쭉 뻗은 길을 달리게 될 수도 있겠다.
그 때 짤랑거리는 금속성 소리가 주머니 속에서 적막한 공기 중으로 튀어나온다면? 그것이 몇 개의, 달과 같은 은백색의 둥근 동전들 때문이라면? 그리고 달을 향해 난 길에 멈춰 서서 등뒤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면? 그래도 이륙을 믿고 뛸 것인가, 아니면 그림자에 묶여있는 현실에서 잡을 수 있는 달이란 6펜스임을 인정할 것인가? 이처럼 <달과 6펜스>에서는 이상과 현실, 정신과 육체가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머셋 모옴이 이 책 곳곳에서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하듯, 인간의 삶이란 미묘하고 모순된 것이다. 그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하면서, 단순히, 일상이란 무의미하고 뜨거운 정열과 모험이 있는 삶만이 가치 있다고 말하려고 했을까? 오히려 일상 속에서, 무의미한 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삶에 이끌리지 말고 그것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 예술가의 삶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찰스 스트릭랜드가 예술가이고 천재이며, 악마적인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그는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40이 넘은 나이에 화가의 길을 향해 나아갔던 그 모습에, 우리는 너무도 일찍 젊음과 꿈을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지금 이 상태로 머물도록 잡아끈다. 어떤 이는 스트릭랜드 부인처럼 물질에 대한 허영심이나 남들의 이목이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짓도록 내버려둔다. 블랑슈 스트로브가 그랬듯이,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 심지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몸과 마음은 끈적거리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러한 욕망들, 나를 구속하는 무거운 그림자에 분노한다. 스트릭랜드가 ˝안일한 행복˝으로부터 뛰쳐나와 무한한 꿈으로 나아간 것처럼 나도 욕망을 벗어버리고, 보다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 때도 많다. 하지만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살갗을 맞대고 사는 삶, 평범한 삶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세속에 대한 욕망과 이상에 대한 욕망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욕망이 갈등을 일으키고 서로 시소놀이를 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그녀가 어리석고 신념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거야.˝
찰스 스트릭랜드는 블랑슈의 죽음을 두고 자신을 비난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때 ´나´는 스트릭랜드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화가 치밀었다고 말한다. 스트릭랜드는 블랑슈의 어떤 점이 어리석다고 한 것이며, ´나´의 분노는 무엇에 대한 분노일까?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을 구속하기에 과감히 버려야 하고, 인간은 모든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서머셋 모옴이 두 사람을 통해 비판하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다른 것들이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인간들에 관한 것이지 않을까? 정말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가, 정말 사랑하는가를 물어보자. 어쩌면 나의 욕망은 그 대상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모방한 것일 듯도 한다. 남들이 다 돈, 사랑, 명예와 같은 것들을 바라므로 나 또한 그것들을 추구하며, 내가 사는 사회가 선하고 가치 있다고 규정한 것들을 아무런 물음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나´의 분노는, 이처럼 내가 아닌 외적인 힘에 의해 나의 욕망이 굴절되고 왜곡된 삶, 사회에 녹아들어 유기체의 한 부분으로서만 존재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이지 않을까.
이 소설의 첫 부분에서 ´나´는 스트릭랜드 가족을 바라보면서, 일상의 안일한 행복 속에 경계해야할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아마 자의식의 상실이지 않을까 싶다. 자의식을 상실하고 외부에서 규정한 상식에 몸을 맡겼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을 때, 곧 닥쳐오는 것은 멈춤, 곧 파멸일 것이다. 하지만 늘 젊은 세대들은 운명을 개척하려 한다.
서머셋 모옴은, 기존의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모험과 변화를 찾아 떠나서 새로운 것들을 가지고 돌아와 사회를 진화시키는 것은 젊은 세대의 몫이라고 말하고 있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러한 젊은 정신, 예술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뜨거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그것을 추구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니까!˝가 그의 대답이다.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 나지는 않지만 불교에 관한 책에서 읽었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현명한 자의 불행이다. 그(고따마)는 풍요함과 아름다움 속에 묻혀 살면서 만족 그 이상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충족되지 않았다. 그 때 그는 자신이 운명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이끌고 있는 존재가 삶의 실재가 아니라 너무도 오랫동안 계속된 휴식이라고 생각했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6펜스의 삶,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삶에 대한 분노가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스트릭랜드의 영혼을 깨웠던 것이리라.
잠에서 깨어난 그의 영혼은 욕망에 분노하고 그것과 투쟁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의 욕망과 화해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트릭랜드의 그림에서 원시적 아름다움과 동시에 두려운 무언가가 느껴진다 말한다. 그의 작품 속에 깃들어 있는 영적인 힘은 난폭한 관능을 동반한다. 그것은 ˝반발을 느끼게 하면서도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원시적 힘의 표현˝이라고 묘사된다. 스트릭랜드가 창조해 낸 아름다움 속에는 태초의 에덴동산, 이원성이 성립되기 이전의 원시적 본능이 드러나 있다. 그러한 그의 작품 앞에 선 인간은, 열등한 것으로 거부되어왔던 육체와 대자연으로의 향수에 당혹스러워하고, 원시적 본능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그 자신이 끊임없이 부정하고자 했던 욕망, 그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 본능인 성적 욕망과 악마성을 긍정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억압되었던 본능을 표출함으로써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욕망의 전환을 잠정적인 결론으로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론이라기보다는 대안, 지금 내 상황에서 그것이 아니면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제시하는, 허망함과 싸우기 위한 대안으로써 말이다. 인간이 욕망의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이상, 그런 속박된 존재로서의 고통을 긍정하려 한다.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간을, 나라는 존재를 무화시키려는 파괴적인 힘을 자기자신을 발견하고 이루어 가는 방향으로 전환시킨 인간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끝내는 자신을 한계 짓는 욕망에 대한 분노와 화해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육체라는 한계성에서 벗어나려 갈망했지만, 예술을 통해 그의 영혼은 다시 육체를 찾고 진정한 자기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술은 그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하게 했던 매체였다. 스트릭랜드가 예술을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단언하는 까닭은, 그의 경우 예술을 통해서, 늘 보아왔던 사물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보았고, 그 자신에게 의미있는 독자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스트릭랜드와 같이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씁쓸해 하면서 책을 읽고 있었을 때, ˝나도 역시 나대로의 예술가˝라는 브뤼노 선장의 말은 위안과 감동을 주었다. 스트릭랜드가 미를 창조하고자 하는 열정을 불태웠다면 선장은 생활에 대한 욕구로 그의 삶을 가꾸었던 것이다. 둘 다 아름다움을 구한다는 점이나 수동적 욕망을 능동적 욕망으로 통제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어쩌면 무의미한 일상으로서의 기계적 노동이 아닌, 일상적 행위 하나하나를 의식을 행하듯 행하며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던 브뤼노 선장과 같은 삶이야말로 우리들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인간의 삶이 예술작품이 될 수는 없을까? 어째서 램프나 집은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삶은 안 된다는 말인가˝
라고 말했던 푸코의 ´존재의 미학´을 떠올리며...
욕망을 경멸하고 분노하기를 꿈꾼다. 그리고 끝내는 그것과 화해할 수 있기를 꿈꾼다. 나는 무엇을 통해서,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세계를 창조할 것인가? 달과 같은 이상을 꿈꿀까? 6펜스 짜리 동전의 반짝임을 긍정할까? 이제는 욕망의 무거운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맹목적인 바람이 배신일 것도 같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결국은 무거운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그것을 짊어지고 힘겹게 비상했던 것처럼, 철저히 고통스러워하면서 꿈을 꿀 수밖에... 당장은, 일탈을 동경하면서도 ´지금, 여기´를 부정하지 않고 일구어 가면서, 소비적인 욕망을 차츰 창조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내 삶의 방식으로 삼고 싶다.
그리고 언제라도 운명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갈 수 있도록 깨어있고 싶다.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바쁜 삶 속에서 무의미해져버렸던 현재를 ˝영원한 현재˝로...!
(교보문고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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