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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적의 시간(상) |  | |
| 보리슬라프 페키치 : <기적의 시간>(상)
역자 : 이윤기 / 출판사 : 열린책들 / 출판일 : 1993/5/1 / 쪽수 : 268
<복음서를 바꿔서 생각해본 기막힌 변주>
´예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신성모독이라고 하며 팽개쳐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예수´라 불렸던 한 젊은이가 기적을 베푼 그 시간에 기적을 당하는 자들의 입장을 때론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작가인 페키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무엇을? 기적을 당하는 자들의 인간적인 고통을.
이 책은 가나에서의 포도주의 기적, 나병환자를 치료한 야브넬의 기적, 벙어리에게서 마귀를 쫓아낸 예루살렘의 기적 등 7가지 기적의 뒷 얘기와, 유다의 죽음, 가파타의 죽음 등 4가지 죽음의 이면을 다루고 있다.
나병 환자를 예로 들어보자. 졸지에 나병에 걸려 하나님께 은혜 받은 ´성한 자´들의 마을에서 쫒겨나온 에글라는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신야브넬 골짜기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성한 자´들이 사는 구야브넬의 전 남편을 못 잊는 에글라는 신야브넬과 구야브넬의 중간지점에서 방황하다가 순연인지 악연인지 지나가던 어느 젊은이에게서 ´은혜를 받고´ 나병의 흔적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뛸 듯이 기뻐하며 구야브넬의 ´성한 자´들에게 돌아가지만 아무도 그녀의 나병이 사라졌다고 인정해주지 않는다. 사제에게서 정결함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의식까지 치르지만 정작 지아비는 말한다.
˝하지만 에글라여, 속은 어떤지 모르지 않는가? 이스마이 사제가 들여다볼 수 없는 그대의 속은 어쩌겠는가?˝
´성한´ 마을 사람들은 정화수도 미치지 못하는 ´속으로 든 문둥병´이 두려워 돌을 던져 이 ´은혜 받은´ 여자를 마을에서 쫓아낸다. 하릴없이 나병환자들의 골짜기로 다시 가보는 에글라. 하지만, 그쪽에서는 그쪽대로 너는 이미 우리 동아리가 아니라며 받아주지 않는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중간 지점에서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버리는 이 ´은혜 받아 나병이 나은´ 여자. 이것이 바로 기적의 이면이다.
나는 이 책의 장점을 여러 가지로 들고 싶다. 첫째는 작가인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문체이다. 얼른 보기에 심각할 수도 있는 주제를 이 작가는 아주 유머러스하게 다루고 있어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갈 때마다 그 절묘한 위트에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저는 정화수에 멱을 감았고, 희생 제물도 외상으로 샀어요. 조금 있으면 이스마이 사제로부터 당신 앞으로 청구서가 날아올 거예요.˝ 그렇다. 정화예식에도 비용이 들 테니 외상으로도 할 수 있고, 청구서도 날아올 터. 이 간단한 사실에 킥킥거리게 된다.
둘째는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작가의 지식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그는 근동지방의 역사지리적인 사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예루살렘의 병신들의 거리, 향내가 진동하는 유다 땅, 세리꾼의 초소, 라자로의 장례식 묘사 등은 압권이다.
셋째는 희곡과 시나리오를 많이 쓴 작가답게 각 이야기마다 바로 연극으로 만들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갈등 구조가 뚜렷하고 기승전결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들 중 ˝예루살렘의 기적˝ ˝가다라의 기적˝ ˝야브넬의 기적˝은 실제 라디오극으로 방송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복음서의 뛰어난 변주를 기막힌 필체로 번역한 이윤기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가 번역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우리나라 최고의 번역작품이라고 하지만, 이 책 번역 또한 그에 못지 않다. 번역서를 읽는 건지 원래 우리 글로 된 작품을 읽는 건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이 책. 페키치가 이윤기를 만난 것은 또 다른 ´기적의 시간´이리라. 어쩌면 이윤기는 페키치의 작품을 나름대로 변주해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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