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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  | |
| 이인화 :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출판사 : 세계사 / 출판일 : 1992년 3월 1일 / 페이지수 : 270
나로서는 문학에의 갈증에 자리끼를 찾는 심정으로 집어들었던 책이었다.
그러나 이제 청소년기에 있는 나에게 소설 자체의 존재이유를 묻는 이 난해한 소설을 어찌 이해할 수 있었으랴. 그저 막연하게나마 진정한 자아란 ´...가 되고 싶은 나´, 아니 ´...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무정형의 가능 태로서의 자아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년이 지나 다시 읽게 된 이 소설엔, 그러나 나이의 벽을 넘어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장애물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저 지독히도 암울했던 80년대를 온몸으로 견뎌온 386세대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코드들이다. 타협을 모르는 순수한 아이디얼리스트가 아니면 변절한 기회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던 80년대와, 철저한 리얼리스트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90년대의 그 극렬한 대비를, 어느 세대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엄청난 간극을, 그 시련을 견뎌야만 했던 386세대, 이 소설은 그 ´잃어버린 세대´에 바치는 오마주였던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으로서, 작가는 마치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소설 속 정임이 그랬듯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존재근거에 대한 물음, 자아에 대한 탐구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걸까.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상, 기계의 부속품과도 같은 우연적 삶이 이들에게는 지옥보다도 더 치욕스러웠던 걸까. 키에르케고어 식으로 말해서, ´윤리적 인간´으로서만 평가받고 대접받는, ´객관적 자아´가 절대 명제가 되어버린 90년대 386세대의 아픔은, 그 90년대에 철저히 길들여 자라온 297세대인 나로서는 가슴 절절히 녹아들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제는 진부한 소재가 되어버린 현실과 허구의 논쟁에서 허구의 손을 들어준, 작가의 그 위험한 발상이다. ´소설 속 소설 속 소설...´의 무한개 액자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소설은, 고의적으로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해체시키고, 나아가 현실의 허구로의 완벽한 흡수통합을 이끌어내고 있다. 현실의 작가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이인우´라는 소설 속 작가의 이름과 그의 이력, 소설 속 ´소설´과 소설 속 ´현실´을 교차 편집시키는 방식은 어느 게 현실이고 어느 게 허구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경계허물기의 구체적 장치인 것이다.
허구와 환상의 대표주자격인 소설에 대한 소설, 영화에 대한 영화는 결국 가상현실에 대한 그것일 수밖에 없다. 꿈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이라는, 꿈과 현실 사이의 불명확한 경계는, 수천 년 전 장자의 이야기를 굳이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이미 학계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그리고 가상현실에 대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존재의 실체에 대한 물음, 나아가 육체와 정신의 논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근래에는 개체구분의 기준으로서, 물리적 현존으로서의 ´몸´의 우월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육체와 정신, 현실과 허구와의 화해와 타협을 그려도 시원찮을 판에, 허구의 완벽한 승리라니, 더구나 진정한 자아란 허구의 이미지라니 이런 넌센스가 어디 있는가. 나비의 꿈을 꾼 장자를 나비라고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메타포와 이미지와 꿈만으로도 배부르던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창조해낸 세계가 진리이고 필연이고 구원일 수밖에 없는 ´심미적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결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른 선택일 수밖에 없어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현실세계에는 ´심미적 인간´이 있는가 하면 ´윤리적 인간´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인간도 있으니까. 이 소설처럼 ´소설을 반영하는 현실´을 그린 소설이 있는가 하면, 여타의 평범한,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도 있으니까.
작가 개인은 진정한 자아를 열심히 창조해내는 일로써 행복을 느낄지 모르나, 현실의 그는 어쩌면 한갓 과대망상을 노정한 구름잡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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