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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전경린 :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출판사 : 문학동네 / 출판일 : 1997/2/22 / 쪽수 : 318

<잊을 수 없는, 또는 잊으면 안 되는>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를 읽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는 97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다.
철저히 아날로그적인 내가 더디게 변했다면, 세상은 온통 인터넷으로, 디지털로, 정보의 경쟁으로 뒤덮여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변해 버렸다. 4년 6개월이 흐른 지금에,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의 소재는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는 치열한 학생 운동을 한 후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태인과, 그를 사랑하는 여자 이나와, 이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정서현, 태인을 사랑하는 정수, 이렇게 네 사람을 얘기하고 있다.
작년에 영화 <박하사탕>을 보면서, ´아, 이렇게 많은, 온갖 중요한 소재들을 이렇게 버무려서 할말은 다하면서도 무겁지만은 않은 영화를 만들어 내었구나.´하고 감탄한 적이 있다. 나는 무거운 소재들을, 잊혀져 가는 일들을 요리 조리 피해온 것은 아닐까?
˝이게 어때서요? 난 엄연히 조직 활동을 하고 있어요. 우린 구속동지들을 보살피고 있고,이제 곧 97년 대선 준비 작업도 시작할 거예요. 난 엄연한 활동가예요. 제가 원하는 건 계속 열심히 일해서 다시 87년 8월 같은 노동자대투쟁을 벌이는거예요.˝(p65)
태은을 사랑하는 노동자 정수의 말이다. 97년 대선을 준비한다는 말에, 나는 소설을 떠나서 시간의 흐름에 잠시 몸을 떨었다. 대선이 있었던 날, 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 어떤 cafe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대선 결과를 알게 되었었는데, 전경린이 이 소설을 쓸 때만 해도 사람들은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 때만 해도 80년대 투사들은 잊혀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얘기되었고, 소설로 태어났다.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전경린의 신작 <나는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를 읽고, 전경린의 초기작은 어떤지 궁금해서였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는 지금의 전경린의 작품과 많이 다르다. 어떤 느낌이냐면, 회사 동료 집에 놀러가서 앨범을 보는데 고등학교 때 사진을 보면서 예뻐졌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너 참 세련되졌구나.˝ 이렇게 말하는 느낌이다. 같은 얼굴, 같은 키이지만 시대를 반영하는 세련된 옷과 칼러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나는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에서 제도를 이탈하고자 하는 급격한 정신과 성애의 표현을 보여주었다면,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에서는 오직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어떻게 보면 철저하게 평면적인 여자를 그리고 있다.
이 세 소설 중에서 가장 연애소설에 가까운 것이 어떤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아무곳에도 없는 남자>라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80년대 투사 태인을 등장시켜 언뜻 보면 운동권 활동가들의 후일담 소설인 것 같기도 하지만,이 소설의 곤조는 한 여자의 한 남자를 향한 처절한 사랑이다. 또한, 전경린의 신작에서 나타나는 전경린의 어투가 어딘가 세련되면서도 공격적이라면,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에서 전경린의 어투는 어눌하면서 서정적이다.
˝이나는 잠들기 전에 조금 울었다. 불행이란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된 담요처럼 조금 눅눅한 대로 다정해서, 때로는 푹 파묻히고 싶도록 따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p213)
이 문장처럼 서정적이면서 절절한 표현이 많다. 여자들은 세련돼지면서 날카로와지곤 하는데, 전경린의 소설도 이렇게 서정적인 표현들에서는 많이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잘 쓰여진 연애 소설을 읽었다. 해피엔딩이 아닌 연애소설, 또한 97년부터 가파르게 흘러가 버린 나의 시간들을 돌이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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