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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방, 해변의 길손
한승원, 임철우 : <붉은방, 해변의 길손>(´88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 12)

출판사 : 문학사상사 / 출판일 : 1988/10/1 / 쪽수 : 500

<껍질을 뚫고 본 인간과 사회의 모순>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한 남자가 서있다. 자아를 송두리째 빼앗긴 것 같은 허탈한 표정만이 그의 얼굴에 스며 있다. 잠시동안 그렇게 서 있던 남자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인다. 무언가를 꿰뚫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눈은 무서운 분노로 이글거린.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은 고등학교 교사 오기섭이 어느 날 출근길에 갑자기 건장한 사내들에게 붙잡혀 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오기섭은 어느 주택의 넓은 지하실에 마련된 ´붉은 방´에서 고문을 받는다. 사방이 온통 사람을 아찔하게 하는 핏빛으로 가득 차있는 붉은 방……. 오기섭에게는 붉은 방에 끌려와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다만 얼마 전 시국관련사범으로 수배 중인 친구의 후배를 며칠 집에서 재워준 것뿐. 그러나 오기섭은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조차 나눈 일이 없는 그로 인해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터였다.
오기섭을 고문하는 최달식은 소위 ´빨갱이´로 인해 가정의 비극을 맞은 인물로 그의 가슴엔 빨갱이에 대한 복수의 칼날이 번득이고 있었다. 어릴 적 그의 아버지가 눈앞에서 쏘아 죽이던 빨갱이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들에게서 흐르던 피의 이미지로 그의 마음은 얼룩져 있다. 그에게 도사리고 있는 잔인성은 오기섭을 고문하면서 한껏 발휘된다.
주먹질과 발길질은 물론이고 물고문까지 서슴지 않는 최달식은 끝내 죄 없는 오기섭으로부터 사회주의자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야 만다. 얼마 후, 오기섭의 무혐의 사실이 판명되자 최달식은 뻔뻔한 웃음을 지으며 오기섭을 그가 잡혀왔던 골목길로 다시 돌려보낸다.
붉은 방에서 행해진 고문들, 그것은 그리 먼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나라의 권력자들은 십여 년까지만 해도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 국민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권력은 언제 찔릴지 모르는 자신들의 허점을 감추기 위해 국민들에게 반공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어, 국민들 내부의 적개심을 소위 ´빨갱이´에게로 분출시키도록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또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말이라도 한 마디 하면, 아무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려가는 일도 허다했다.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쓴 채 권력자들은 몇 십 년 동안 국민에 대한 기만과 횡포를 일삼아왔던 것이다.
소설 ´붉은 방´은 이러한 권력을 고발함과 동시에 잘못된 믿음과 신념이 개인을 어떻게 파멸시키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최달식은 자녀나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미루어볼 때 인간성이 상실된 인물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심어준 ´빨갱이´에 대한 증오가 타오를 때면, 그는 이성을 잃고 잔인한 한 마리의 짐승이 된다. 때로는 그의 잔인성이 가족으로 전이되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최달식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인간인 동시에 그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인 것이다.
다시 예전의 골목으로 내팽개쳐진 오기섭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다. 보는 이를 아찔하게 했던 붉은 색의 방, 소용돌이치는 화면 속에 한 해골의 형상이 귀를 틀어막은 채 비명을 지르는 뭉크의 그림과도 흡사한 그 기억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에…….
´붉은 방´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한 인간이 지하의 붉은 방으로 사라졌을 때에도 아무 일 없는 듯 순조롭게 돌아가는 사회, 권력의 보이지 않는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대중들,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숱한 모순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딘가에 붉은 방의 존재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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