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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조건
앙드레말로 : <인간조건>

역자 : 박종학 / 출판사 : 홍신문화사 / 출판일 : 1992/7/1 / 쪽수 : 400

<사랑과 죽음이란 고통을 토대로 딛고 서있는 인간의 존엄성>
´젊을 때 인생은 시장과 같다. 그런데 그 시장에서는 돈이 아니라 행동으로 값진 것들은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무 것도 사지 못한다.´
자칫 책 안에 갇혀 살 수 있는 나에게 앙드레 말로는 여러모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문학자로의 지성과 정치가로써의 행동과의 조화를 그럭저럭 이루어낸 인물이기 때문이라서 그런데, 그는 젊을 적에 쿠바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고 남미로 또 다른 혁명을 위해간 체 게바라처럼 세계 1차 대전(탁석산의 말대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일부에 벌어진 전쟁을 ´세계´전쟁으로 부르는 것은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사고의 소산이다.)의 승리감에 도취된 유럽을 뒤로하고 동아시아로 건너가 공산주의에 매혹되어 투쟁적인 삶을 살았고, 굵직굵직한 사건을 치루어 낼 때마다 한 편씩의 소설을 써내 소설가로써의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위 인용은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인데 나 역시 시장에서 아무 것도 사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적어 본 것이다.
´인간조건´은 역사적 사실을 다룬 사회소설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그리고, 그 인간이 살고 있는 인간조건을 다루고 있다는 심리적 소설의 측면이 강하다. 나는 사회소설로써의 ´인간조건´을 통해 장 가이섹은 좋은 사람, 마오쩌둥은 나쁜 사람이라는 중고등학교에서의 제멋대로의 교육을 통해 나에 남아있는 그들의 이미지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남아있었던 장 가이섹의 이미지는 민족주의자, 전쟁 패배 후 대만으로 도망가면서도 문화재를 먼저 챙겨 타이페이에 고궁박물관을 세운 그런 사람이었고,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공산주의자, 6.25동란 때 중공군의 우두머리였는데 이러한 도식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창작과 비평] 7호에서 읽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글을 통해서도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적이 있었었는데, 언젠간 이승만과 김일성을 재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혁명과 독립의 시대 속에서 다들 자기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행동했던 것으로 그 결과로 인해 그들의 의도는 무시된 채 오늘날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역사의 종언´을 말했듯이 오늘날 더 이상 이데올로기는 유효한 단어가 아니다. 물론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기보단 자본주의라는 무자비한 상황 속에서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의 숨이 막혀버렸기 때문이지만, 이젠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맑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에(맑시즘이 더 이상 무의미한 사상인지 잘 모르겠다. 대학생들이 더 이상 읽으려 하지 않으니 죽은 사상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은 지금까지도 유효하고, 비록 읽어보진 않았으나 데리다(Jacque Derrida)도 맑스의 유령을 다시 부르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찾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의 카토프, 첸, 기요 등은 목숨을 바치고 있다. 이데올로기 자체만을 위해 목숨을 바쳤나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이 필요할 거 같지만, 중국 노동자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국적이 다국적인 것을 보면 마치 자본주의가 그러하듯 맑시즘도 국경을 초월하고 있다. 이러한 국경을 초월하는 이데올로기는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인간의 조건에서 유일한 출구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어느 시대에도 인간의 조건이 나아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조건 속에서 인간이 지금껏 살아온 이유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이 됐던 간에 어느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인데, 내가 지금 여러 목적을 갖고 내 삶을 유의미하려 하며 살고 있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멀리 보이는 촛불을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멀리 있는 촛불로의 고된 길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사랑과 죽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단어는 무척이나 자주 사용하면서도 가장 알 수 없는 단어이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맹신하기에 알 수 없는 단어이고, 죽음은 내가 죽어본 적이 없기에 역시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사랑과 죽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고통의 토대 없이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조르 노인의 말대로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죽음은 강하고, 밑의 인용문처럼 사랑은 따뜻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이성간의 대립이 아닌 사랑하는 상대의 얼굴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 아늑한 음악의 정서를 구체적인 생활에 끌어들이는 그러한 정다움으로 생각되었다.´
기관차 화통 속에서 산 채로 태워 죽임을 당할 운명을 앞두고 자신이 미리 준비한 청산가리를 동료들에게 주고, 불난 집에서 운 나쁘게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라며 의연히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카토프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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