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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핏기 없는 독백 |  | |
| 정영문 : <핏기 없는 독백>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 출판일 : 2000/3/31 / 쪽수 : 250
<근대적 이성의 체계에 대한 죽음의 반란으로 독백하기>
언제나 시간에 속박되어 살아가는 인간은 겨우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럭저럭 어떻게 살다보니 이렇게 살고 있고 또 별 큰 희망 없이 내일을 구상해 보는지도 모른다. 근대의 체계가 강요하는 논리 앞에 인간은 익명의 나날을 보내다 그저 그런 삶을 마칠지도 모른다. 결코 화려하지도 지극히 처절하지도 않는 삶. 그런 삶은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만드는 수도 있다. 오히려 죽음을 찬미하지는 않을지라도 기다릴 수는 있는 그런 삶. 이 시대에 지극히 핏기 없이 냉정한 허무주의가 때로는 솟아오르기도 한다. 이 위험한 시도 역시 소설가의 몫이다.
정영문의 장편 <<핏기없는 독백>>은 겨우 존재하기만 하는 삶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소설이다. 그러기에 그의 비극적 세계관은 엽기적인 발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기존 소설의 문법체계를 과감히 허문다. 세계의 비관적 인식의 끝간데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존재 자체가 부조리라는 것을 말해주는 소설적 악몽이다. 현실과 존재의 자명성이 그에게서는 이미 무너져버려, 인간은 희망도 없고 그렇다고 지극한 절망도 없이 그저 그렇게 ˝약간만 존재˝(p. 164)하는 피조물일 뿐이다.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화자의 조서(弔書) 같은 형식을 갖고 있다. 죽음을 담담히 기다리는, 그래서 시간도 공간도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쉬고자 하는 주인공의 환멸에 찬 조롱과 야유이다. 환멸의 언어가 질기게 말꼬리를 이어가며, 분열된 주체의 대화로 이루어진 것이 ´핏기 없는 독백´이다. 그러니 제목은 독백이라고 했지만, 어찌 보면 대화인 셈이다. 순서를 기다리다 자신의 때가 오면 온갖 허무의 침을 튀기는 분열된 주체들의 질서정연한 대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메타 소설이다. 소설을 쓴다는 행위에 대한 반성적 자의식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이 자신의 창작행위에 대한 비평까지 동원된다는 점에서 메타소설이다. 그러니 그의 소설에는 한 몸을 빌린 여러 심리 주체가 공존한다. 좀 전에 말했던 여러 주체들간의 대화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주체들간의 혼란스런 대화를 통해 도달하는 곳은 죽음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이다. 왜 죽음인가? 이를 묻고 따지다보면 작가 정영문의 주제의식을 간파할 수 있다. 작가는 근대적 이성이 만든 체계를 허물려고 하는 것이다. 작중 주인공은 그래서 체계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나의 이성이었다.˝(p. 78)
라고 한다. 또,
˝모든 규칙에는 예외를 두고, 그 모든 예외적인 것들을 예외 없이 규칙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실상 규칙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pp. 87∼88)
라고 하면서, 체계의 허위를 공략한다. 근대 이후 체계가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것이 헤겔 식의 변증법이다. 그러니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반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자칫 정·반·합이라는 무시무시한 쳇바퀴에 걸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인공은 아예 중심과 바깥의 이분법을 무시화시켜버리는 것이다. 체계와 마주하다간 펫숍 삼촌 앞의 한창림처럼 말도 못하고 울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체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 체계를 희화화하거나 죽는 수밖에 없다.
죽음이 궁극적 해결책이냐에 대해서는 말이 많을 법도 하지만, 어쨌든 정영문이 보이고 있는 문학적 포오즈는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라 할 만하다. 앞으로 그가 보여줄 문학세계가 궁금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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