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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역자 : 남수인 / 출판사 : 세계사 / 출판일 : 1995/4/1 / 쪽수 : 358

<한 자유로운 인간의 초상에 대하여>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고대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일단 훑어보는 언제나의 버릇 탓이었다. 그리고 좀더 주의를 기울여 첫 장을 넘긴 것은, 하드리아누스라는 인물이 꽤 즐겁게 읽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피는 통하지 않지만 할아버지라는 점과 오현제 중 한 명이라는 피상적이기 짝이 없는, 하지만 천박한 허영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사전 지식 탓이었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기에는, 하드리아누스라는 한 인간으로 충분했다.
이 책은 바로 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노황제의 염려 섞인 편지로 시작한다. 자신의 늙은 육체에 대한 메마른 묘사와 젊은 미래의 황제에 대한 점잖은 염려는 이윽고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해 흘러간다.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에 취한 젊은 학생이 이윽고 세상에 유용하게 쓰이고자 갈망하는 유능한 청년 장교로 성장하여 선대 황제의 지명을 받아 황제의 지위에 오른다. 그럼에도 허황된 출세 이야기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이야기가 결코 개인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한 모든 것들, 저물어가는 그리스의 창백한 광망, 로마의 건강한 합리성과 성실함, 풍요로운 오리엔트의 평원, 충성스러운 친구들, 그리고 인생 전부는 아니었어도 그 인생의 정점에서 한순간에 그의 모든 것을 장악해버렸던 젊은 영혼.
그의 인생에 녹아들어 그의 모습을 형태 잡았던 그의 시대가, 다름 아닌 그의 세계가 무엇보다 강렬히 눈앞에 읽는 이를 매료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그가 서있다.
물론 그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몇몇 귀부인들과의 추문, 가깝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타인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취미, 정치가 특유의 교활함, 인간 그것도 권력의 정점에 선 자로서의 권태와 그에 기인한 변덕. 그가 인정한 몇몇 단점과 은폐한 단점들이 한 위대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복잡한 인간에게 현실이라는 음영을 더해주고 있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역시 반한 탓일까.
실제로 그는 황제로서의 임무를 화려한 제전이나 연회에서가 아니라 유태인 헌옷장수와 그리스인 식품상이 평온하게 이웃하여 살도록 설득해내는 데서 찾아낸 사람이었다. 전장에서가 아니라 법정에서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얻어낼 수 있는 평화, 그것도 일시적일 것이 분명한 그것을 위해 그는 기꺼이 그것을 해냈다. 정복전쟁의 뒤처리라는, 조금도 빛이 나지 않는 일의 업적을 그는 바르게 이해했고, 반면 전쟁이 필요할 때는 군대로서 관철할 만큼의 결단력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우울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니었다. 오히려 쾌락주의의 경쾌함에 가까운 냉정하면서도 차갑지 않은 시선으로 삶을 바라본 사람이었다.
결국 이 책에 들어있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이다. 메마른 지식의 나열이나 무의미한 자랑이 아니라, 다만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인 한 인간의 삶. 위대한 황제이고, 로마인이며, 남자였고, 한 인간이었던 이의 그것. 작가가 무수한 고민과 노력 끝에 깎아낸, 그리스의 신들이 사라지고 그리스도는 아직 오지 않았던, 오직 인간들의,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자신들의 발로 서있던 이들의 시대. 이 책은 그 시대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던 한 남자의 얼굴이다. 그리고 우연히 그 얼굴을 엿본 나는, 사랑에 빠졌다고 감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에 대한 흥미가 없더라도, 위대한 황제의 이야기에 대한 천박할 지도 모르는 호기심이 없더라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이 있다면, 읽어볼 것을 권한다. 문학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지 이 책 이상으로 내게 가르쳐준 것은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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