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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황 나무를 잘라 판 이야기 -김경린

그날따라 아버지는 몹시 성난 사람처럼 성화당 나무를
마구 자르는 것이었습니다. 한 그루, 두 그루, 세 그루의
순으로 뿌리 근처를 예리한 톱으로 잘라 내고 있었습니
다. 2인용 톱이었기 때문에 넷째 삼촌도 이를 거들고 있
었지만 나는 왜 그런지 주위를 맴돌 뿐이었습니다.

(성황당 나무를 잘라도 괜찮을까? 새파랗게 자라는 나무
를 자르는 것도 안됐는데?)

커다란 나무가 몸뚱어리째 쓰러져 갈 때마다 나는 도망
치듯 멀리 달아나야 했습니다. 나무에 깔리는 것이 두렵
기도 했지만 커다란 나무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삼촌과 나는 그 나무들
을 장작처럼 쪼개어서 웅기의 정어리 공장에다 팔고 밀가
루를 사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30년대의 농촌은 흉
년이 드는 겨울이면 그만큼 식량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
다.

그런데 아버니는 어젯밤에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습
니다. 무엇을 어디에서 일했는지 말쑥한 하이칼라 양복
차림으로 돌아왔었습니다. 아버니는 3·1운동 때에 만주
의 용정중학에 재학중이어서 독립만세에 가담한 탓으로
왜놈 경찰이 무서워서 집에 있지 못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귀뜀이었습니다. 그런 탓으로 아버니는 늘상 말이 없었고
그 분풀이로 성황당 나무라도 자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음날에도 새벽같이 어디론
가 떠나야 한다 해서 어머니는 밤새 와이셔츠에 풀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촌과 나는 새벽 일찍이 두 대의 우차(牛車)에 장작을
싣고 웅기로 향해 떠났습니다. 새벽 두 시의 하늘은 무척
푸르렀고 별들은 이웃집 순이의 눈동자처럼 빛났습니다.
하지만 영하 30도의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무거운 장작을
싣고 가는 황소와 암소가 무척 가엽기만 했습니다. 60리
길을 겨우 열 두 시에 도착한 우리들은 장작을 정러리 공
장에 팔고 대금까지를 챙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검짐 식
사를 하러 간 호떡집에서야 그 돈이 삼촌 주머니에서 몽
땅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 밤 점심조차 거른 채 집으로 돌아온 우리들에게
할머니는 성황당 나무를 잘랐으니 벌을 받은 것이라고 야
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돈을 잘 간수하지 못한 탓이야. 그것보다도 중
요한 것은 성황당 나무뿐만이 아니라 사람처럼 생명을 가
진 나무 같은것을 함부로 자르지는 말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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