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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스님 회곡록 1장 - 1편 - 1부
1장 마지막 비구(比丘)들

◈1편 - 죽음과의 첫만남 1부◈
시작도 끝도 없는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먼지만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이 짧게는 20~30년,길게는
80~90년을 살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우리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간 흔적은 무엇인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가,아니면 또 다른 시작인가. 한평생
살아오면서 형성된 ˝나˝를 그대로 간직한채 영원히 살 수는 없는가. 이 생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떤 형태로든 계속할 수는 없을까. 이대로 끝나는가. 정말 마지막인가. 삶은 이토록싱겁고도 허무한 것인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사춘기나 청년기에 이르면 누구나 품어보는 의문이다. 이 의문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여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건곤일척의 용기를 내는 사람은 수행자가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스님들이 득도(得道)를 위해 수행해 왔고 현재도 그렇다. 그들이 모두 삶에 관한
의문을 타피하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면 세상은 한결 밝아졌을 것이고, 그 공덕에 힘입은 중생들은
어리석은 의문과 고통속에서 헤어났을 터인데 사정은 반대이니 이는 또 어떻게 된 일인가.

깨달음은 혼자만의 것이다. 말로 표현할수도 없고 누구에게 나누어 줄수도 없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진실이라면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빼어난 진리이기는 하지만 종교가 될 자격은
없다. 종교란 가르침이 있고 , 그것을 전파하는 기능이 있어야 성립된다. 가르칠 수 없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무려 49년 동안이나 설법했던 부처님의 행적이나 염화시중의 은근한 미소 하나로
대 자각의 그 경지를 가섭에게 나눠 주었던 부처님의 커다란 본보기는.결국 불교의 최종적인 깨달음도
가르치고 나눌수 있음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사레가 아니겠는가..

인생살이 팔십 고개를 넘어 지나온 세월에 묻은 이끼를 벗겨내고 하찮은 이야기들을 반추하려는 이유도
후생을 위해 원가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끈덕지게 요구하는 사람들의 성화를 이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후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도 변홤없는 나의 한결같은
생각이고, ˝그래도 도움이 되니 지나온 발걸음과 속에 담은 ´말´을 토해내라˝는 것은 주변의 강권이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팔십 년 하고도 몇 년을 더
살아온 ´나´의 세상살이는 그 재미가 여간 큰것이 아니었다.하필 이 대한민국 땅에서, 일본제국의
발톱의 찢겨 만신창이가 된 그 시절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의 폭풍우 속을 뚫고 살아온 것도
이만저만한 인연이 아닐 터인데 무슨 복이 그리 많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받을 수가 있었던가.

내가 그 큰 복을 받았으니 받은 것 가운데 만의 하나라도 세상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백 번 옳은 말이 아닐수 없다.

내가 태어난 1914년은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완전히 잃은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앞서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이후 전국적으로 봉기했던 의병활동은 일본 군대와 경찰의 강력한 토벌로 제압되어
산발적이고 소규모적인 지하운동으로 잠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처럼 일시적으로 잠복했던
나라 찾기 기운은 내 나이 대 여섯살 무렵이던 1919년 거대한 활화산이 되어 솟아올랐고,
의병활동 또한 다시 머리를 들었다. 우리 집안이 완전히 몰락하여 거지 신세가 된 것도 바로 이무렵
아버지의 의병활동 때문이었다고 기억한다.

아버지 송동식(宋東植)은 중농 집안의 선비였다. 글을 읽었으니 선비라 할 수밖에 없으나 나라가
제데로 지탱되어 백성들이 제 할 일을 찾아 하는 세상이었다면 아무도 무인이 되었을 사람이다.
인삼 경작으로 유명했던 풍기 고을에서 논농사는 물론이고 삼포도 경작하여 살림이 넉넉했던 아버지는
한학이 깊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신체가 강건하고 우람하여 힘이 셌다.
성격도 급하고 의협심이 강해 남자다운 남자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다.목소리도 우렁찼다.
슬하에 5남 1녀 여섯 자식을 두었으니 모두 성에 차지 않았던지 ˝자식을 여럿 두었는데도 한 녀석도
사람 냄새가 안 나는구나˝하고 한탄하셨던 분이셨다.

이런 사람이었으므로 나라가 망하자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풍기 고을의 무력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였다. 처음에는 은밀하게 이루어졌던 무력항쟁이 조직적인 투쟁으로 변모한
것은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서였다.

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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