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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집, 더불어 삶 / 이상림


[더불어 집, 더불어 삶] - 이상림 / 공간 대표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업무와 관련된 출장이든, 개인적인 여행이든 나는 도시의 오래된 마을을 찾는 버릇이 있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의 때가 묻어나 있으며 모여 사는 공동체의 삶이 있다.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길이다. 집들은 모두 개체로 존재하지만 집과 집,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길을 통하여 모두 하나가 된다. 길이 이웃집을 뚫고 지나가서 뒷길로 연결되고 계단이 집을 지나고 테라스와 출입구를 여러 세대가 함께 쓰는 등 마을 전체가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정겨운 풍경을 자주 만난다.

이런 모습을 접하면서 나는 우리네 주거문화를 생각해본다. 본디 우리네 마을이 지니고 있었던 삶의 풍경도 이런 것이었다. 길 건너 이웃집 풍경이 보일락 말락 어중간한 높이를 하고 있는 담을 넘나드는 시야로 훔쳐보는 재미도 우리네 마을이 지닌 삶의 진솔한 모습이었다. 물론 이웃집 사정을 훤히 알고 지내는 시골 마을의 골목길에서야 이런 풍경을 목격하는 게 예사로운 일이었지만 요즘 우리네 도시 안에서는 살림집들이 몰려 동네를 이루는 주택가라고 해도 여간 해서 만날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한 뼘의 땅이 아쉬운 마당에 어디 남을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있겠는가.

나는 그런 풍경을 서울 북촌마을에서 그려본다. 가회동, 삼청동을 중심으로 한 북촌마을은 그 나름의 마을 공동체 형태가 살아있는 지역이다. 내가 외국에 나가면 옛 마을을 찾듯 외국 건축가들도 이곳에서 도시 공동체의 삶을 발견해내곤 한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이런 의미있는 마을 구조를 갖고도 이를 자랑으로 삼지 못하고 오히려 불만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아 왔다. 이 지역 주민 모두의 생각은 아닐지라도 오래 전부터 관청의 관리를 받아오며 가장 기본적인 재산권마저 제 맘대로 행사하고 살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서울 가회동을 비롯한 북촌의 한옥은 몇 채를 제외하고는 정통 한옥은 아니다. 대부분의 집들이 일제시대부터 조성된 집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도심에 자연스럽게 조성된, 집단주거지역의 마을공동체적 의미와 서울의 흔적을 다소나마 간직하고 있는 장소적, 문화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지키고 잘 가꾸는 일은 그래서 귀중한 일임에 틀림없다. 집은 모여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닮아서 이웃과 대화하는 표정을 담아야 한다. 이게 바로 ‘더불어 삶’이요 ‘더불어 집’이 아니겠는가.

집이 개인의 소유이고 재산권의 가치를 키우는 부동산의 일종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생각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집이 곧 사회와의 공유를 통한 더불어 사는 공공의 문화적 요소라는 인식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더불어 사는 집’이 모여 이웃과 함께 하는 마을 공동체는 개인화된 ‘나’를 좀더 많이 버리는 데에서 출발한다. 버림으로써 더 얻는 생활의 지혜를 배울 일이다. 이웃에 내어주되 그 이웃으로부터 되받아 궁극적으로는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생활의 지혜를 서로가 공유하는 것 역시 우리네 ‘주거문화’를 풍요롭게 하는데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얼마 전 창립대회를 가진 북촌문화포럼이라는 순수 민간단체에 참여하고 있다. 내가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는 북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을 풍경이 지니고 있는 서울 도심에서의 문화적인 힘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어서이다. 이곳이 박제화된 문화 실험장이 아니라, 전시효과를 노린 관광촌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있고 주민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재산권 행사는 물론 주거문화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살기 좋은 동네로 자부심을 갖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미력이나마 함께 힘을 보태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다. 북촌에서 ‘오래된 미래’를 꿈꾸는 것이 요즘 나의 관심이다. ‘오래된 미래’는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며 미래에도 여전히 이어져야 할 우리네 삶의 정체성의 다른 모습일 게다.


경향신문[향기가있는 아침]
2002년 0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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