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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이 상´의 여인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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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여인들
그를 키워준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자 그는 적선동의 가난을 정리한 후 효자동으로 옮겨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그는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 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한량기질이 가만히 잠들어 있을 리 없었다. 사흘을 못 참고 장고 소리 나는 곳으로 찾아간 그는 바로 이곳에서 운명의 여인인 금홍을 만났다.
그는 금홍에 대해 ´보들레르의 흑인 혼혈 정부 잔느 뒤발을 닮은 데다가, 모든 남자들이 한 번 정도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여자´라 찬사를 늘어 놓았다. 여자에 대한 호평에 박한 그가 금홍에 대해 이 정도로 평한 것은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져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천성적으로 예쁜여자를 좋아하던 그는 그녀의 매력에 금새 도취되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금홍을 비롯해 이상은 전생애를 통해 여러 여급과 사랑을 나누었다 .금홍과 헤어진 다음 만났던 권순희 역시 미모를 자랑하는 여급이었고, 또 유일한 정식 아내였던 변동림도 이상의 묵인 하에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간통 사건을 일으켰고, 후에 여급으로 일했다.
이상은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이들은 그에게 잠시동안 위안을 주는 여급일뿐, 그를 오랫동안 지탱해주는 바려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여급하고만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또 애인과 다른 남자들 과의 관계를 방관했던 이유는 무었이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가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다시말해 그는 여자를 가지려고도, 또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보통 남자들이 바라는 열녀형의 양처를 가진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그녀들에게 바랬던 것은 생활의 안정이나, 안정된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여자들에게 문학 소재 혹은 아이디어를 원했다 .이들은 실행활에서 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문학적인 면에서는 그가 문학 속으로 침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그녀들과 나누었던 경험은 소설과 시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
예를 들어 금홍은 ´날개´, ´봉별기´, ´지주회시´ 등에, 또 마지막 여자였던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비 정상적인 직업의 여성들을 택했고, 또 성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던 그는 그녀들의 외도를 묵인해주어야 했다. 더구나 이상의 여자들은 그의 특이한 습성을 이해할정도로 너그러웠고 그중에서도 금홍은 그와 이러한 성향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그의 사랑을 비교적 오랫동안 독차지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 잊고 방황하다가 ´제비´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다방 뒷골방에 마련했던 조그만 살림방은 그의 대표작인 ´날개´의 무대가 되었다.
한동안 금홍은 마담으로 ´제비´ 카운터에서 일하고, 이상은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밤에 밖으로 기어나오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그의 제비다방 시대는 1933년 7월 14일 개업으로부터 1935년 9일, 파산하기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가장 격렬한 사랑마저 이렇게 금방 끝나고 만 것은 폐병 때문에 성기능도, 보석을 사줄 만한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여자에게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 했던 그는 1933년 여름부터 1934년 여름까지 이상 이외의 남자를 만난 적인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몰입했던 금홍에게조차 불성실하게 행동했다.
같이 산 지 1년이 지나자 금홍은 이상에 대해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이야. 게다가 돈도 벌어올 줄 모르고´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로 그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금홍에게 천대를 받던 1934년 그는 <조선 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1933년과1934년은 화려한 문단 등단뿐 아니라 파산, 금홍과의 파경으로 가득찬 해였다. 당시 그가 느꼈던 좌절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하루는 나는 이유없이 금홍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금홍이가 너무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금홍과 서먹해질 즈음 그는 동인들과의 만남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금홍이 나간 직후 그는 잠시 카페 ´쓰루´에 있었던 여급 권순희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여복 없는 그에게 이도 오래갈 리 없었다. 그녀를 짝사랑하다 자살소동까지 일으킨 친구 정인택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채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결혼식의 사회까지 맡아주었던 것.
권순희는 처녀가 아닌 대신에 고리키 전집을 하나도 배놓지 않고 독파 하였다는 여인, 이상의 보배였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박태원, 김유정과 어울려 다니면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심신을 소모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그가 했던 한마디는 그의 생활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
´제비´다방과 금홍을 잃은 후 그는 아버지의 집을 저당 잡혀 인사동에 카페 ´쓰루´와 광교 근처에 다방 ´69´를 개업했다가 곧 망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명동의 ´무기´를 설계해 개업하려 했으나 중도금이 없어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빈민촌으로 가족을 이사시킨 이상은 묵묵히 따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력 사이에서 방황했다.
금홍에 이어 권순희와도 실연하고만 그는 패배감에 젖어 잠시 시골로 잠적했다. 그곳에서 그는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 처럼 쏟아내었다.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1936년, 이상은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해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다.
[변동림으로 가칭되는 여인에 대한 상의 이야기는 「단발」,「실화」,「동해」,「종생기」등에 나옵니다. 그 이름도 그냥 소녀라고 나오기도 하고 임(姙),정희 연 등 여러 가지로 적혀있습니다. 그녀와 동거가 시작된 것은 성천의 여행으로부터 돌아온 후, 1936년의 일입니다. 변동림은 이화여전을 나온 신진 여류작가, 이상이 죽은 후 유골을 가져온 사람입니다. 이상을 사귀기 전에 이미 다른 남자와의 관계가 있었던 여인인데, 작품「동해」의 결혼 이야기 에나오고 있습니다. 이상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또한 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죽어가고 있었던 상과, 이제 막 생명의 힘의 밑으로부터 뻗어오르고 있던 그녀와의 사이에 있는 생에 대한 근본은 그들을 갈라서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자살을 공모했고,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끝내 배반했는데, 그것이 상의 마지막 여인 동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단편과 수필을 몇 편 발표했던 신인이자, 이상의 지기인 구본웅의 배다른 동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상이 가까이 했었던 여성 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여성인 셈이었지만, 이것도 이상의 운명이었을까?
간단한 결혼식을 거친 후 곧 동거에 들어간 그녀는 이상의 가족과 전혀 교류가 없었던 금홍과는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이상의 여자는 모두 여급이었다는 전설을 다시 확인 시켜주는 셈이었다.
건강 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대로 가족과 변동림을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다.
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너무나도 동경하던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자마자 20대였던 조숙한 천재시인 이상은 스믈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종생기´를 끝으로 자신의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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