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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의 (物議) |  | |
| 물의 (物議)
[字解]
物(견줄 물).
議(의논할 의).
[意義]
의론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뭇 사람들의 평판이나 비난을 이르는 말이다.
[出典]
한서(漢書) - 사기경전(謝幾卿傳).
[解義]
한나라 무제(武帝) 때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있던 사기경은 시인 사령운(謝靈運)의 증손자로 성격이 대범하고 술을 좋아하여 조정의 규정 같은 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한번은 잔칫집에 갔다가 별로 취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오는 길에 술집이 보이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수레를 멈추어 일행들과 함께 술이 떨어질 때까지 마구 마셨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구경하였지만 전혀 동요됨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무분별하고 방탕한 행동은 무제의 미움을 사게 되어 결국은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무제는 그를 지방 토벌군에 보냈다가 싸움에 패한 것을 구실로 그를 내친 것이다.
파직 후에도 그와 교제하기를 좋아하는 조관들의 출입으로 그의 집은 항상 붐볐다고 한다.
마침 우연히 좌승(左丞) 유중용(庾仲容)도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는데, 때로는 덮개가 없는 수레를 타고 들판을 산책하고, 술에 취하면 큰 방울을 흔들면서 조가(弔歌)를 부르는 등 세상 ‘물의(物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물의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이고, 불설물의(不屑物議:물의를 일으키지 말라는 뜻)와 같이 일반 세론(世論)을 가리키기도 한다.
오늘날 물의는 남의 주목을 받아 입에 오르내리는 대상이 되는 것, 즉 말썽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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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漢書]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
전 120권. 《전한서(前漢書)》 또는 《서한서(西漢書)》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 사학사상(史學史上) 대표적인 저작이며, 정사(正史) 제2위를 차지한다.
처음 반고의 아버지 반표(班彪)가 《사기》에 부족한 점을 느꼈고, 또 무제(武帝) 이후의 일은 사기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사서를 편집코자 《후전(後傳)》 65편을 편집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반고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수사(修史)의 일을 시작하였으나, 국사를 마음대로 한다는 모함을 받아 한때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명제(明帝)의 명으로 한서 저작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장제(章帝) 건초연간(建初年間)에 일단 완성을 보았으나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가 미완성인 채 그가 죽자, 누이동생 반소(班昭)가 화제(和帝)의 명으로 계승하였고, 다시 마속(馬續)의 보완(補完)으로 완성되었다.
《사기》가 상고시대부터 무제까지의 통사(通史)인 데 비하여 《한서》는 전한(前漢)만을 다룬 단대사(斷代史)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의 난(亂)까지 12대(代) 230년간의 기록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12제기(帝紀) ·8표(表) ·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그 체재(體裁)는 중국 정사편집의 전형(典型)으로서 답습되었다.
《한서》는 《사기》와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곳도 있으나, 이미 후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응소(應邵) ·복건(服虔) ·여순(如淳) ·맹강(孟康) 등 20여 명의 주석가(注釋家)가 나타났으며, 그들의 주석은 당(唐)나라의 안사고(顔師古)의 주석으로 집대성되어 현재의 간본은 모두 안사고의 주석을 부각(付刻)한 것이다.
안사고 이후의 제가(諸家)의 주석은 청나라 말기의 왕선겸(王先謙)이 엮은 《한서보주(漢書補注)》에 집대성되어 있다.
[出處]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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