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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복장주(剖腹藏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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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복장주(剖腹藏珠)
[字解]
剖(쪼갤 부)
腹(배 복)
藏(감출 장)
珠(구슬 주)
[意義]
자기의 배를 갈라 보석을 숨기다 라는 뜻이며,생명보다 재산을 더 소중히 여김을 비유한 말이다.
[出典]
자치통감(資治通鑒) - 당태종정관원년(唐太宗貞觀元年).
[解義]
당나라의 개국황제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충언을 잘 받아드릴 줄 아는 지혜로운 황제이었을 뿐만 아니라 재능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신하들과 한담(閑談)을 나누었으며, 그들과 이야기하는 동안에 가치가 있는 말을 자주 발견하곤 하였다.
어느 날, 이세민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서역(西域)에 한 상인이 있었소. 그는 우연히 진주 한 알을 얻게 되었는데, 그 진주는 이제껏 본적이 없는 가치를 알 수 없는 그런 훌륭한 보물이었소. 그 사람은 그 진주를 몹시 아끼며 혹시 다른 사람이 훔쳐갈까 걱정이 태산 같았소. 아무리 잘 숨겨놓아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결국 자신의 배를 가르고 그 진주를 뱃속에 감추게 되었소(吾聞西域賈胡得美珠, 剖身以藏之). 이렇게 하고 나자 그는 가장 잘 숨겼다고 여기게 되었지만, 아깝게도 자신의 목숨은 포기해야만 했소.˝
이세민은 이야기를 마치자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것은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지 말들을 해보시오.˝
신하들은 황제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이렇게들 말했다.
˝아마도 있겠지요.˝
당태종은 신하들의 대답을 듣고 말했다.
˝어떻게 ´아마도 있겠지요´라는 말만 할 수 있소? 진주는 아깝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몸은 아끼지 않는 이 상인의 행위가 가소롭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만, 일부 관리들이 뇌물을 탐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음은 잘 모르고 있소. 어떤 황제들은 끝없이 향락(享樂)만을 추구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이 상인처럼 어리석은 게 아니겠소?˝
이때 간의대부(諫議大夫) 위징(魏徵)이 이어서 말을 했다.
˝사리사욕과 뇌물을 탐하다가 자신의 몸과 목숨까지 잊어버린 사람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옛날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건망증이 심한 어떤 사람이 이사를 가면서 마누라를 잊고 갔답니다. 그런데 공자는 이런 일은 별로 희귀한 이야기가 아니라며 이보다 더 심각한 건망증에 대해 애공에게 이야기를 했답니다. 이야기인 즉, 하나라 걸왕과 상나라 주왕이 자기의 목숨마저 잊고 지냈던 일이었습니다.˝
이세민이 이야기한 말의 요지는 위정의 말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이세민은 웃으면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렇소. 짐과 여러 신하들은 지금부터 힘을 합쳐 나라와 자신을 잊어서는 아니 되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아서는 아니 되오.˝
황제의 말을 들은 신하들은 모두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 閑(막을 한),談(말씀 담),域(지경 역),賈(앉은 장사 고),胡(턱밑살 호),享(누릴 향),諫(간할 간),議(의논할 의),魏(나라 이름 위),徵(부를 징).
[參考]
<자치통감>이란?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1065년 영종(英宗) 때 착수하여 신종(神宗) 때인 1084년에 완성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줄여서 ≪통감(通鑑)≫이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때인 기원전 403년부터 5대(五代)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인 서기 960년에 이르는 1363년간의 역사를 1년씩 묶어서 편찬한 것으로 모두 294권으로 구성되었다.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資治通鑒)의 저자 사마광(司馬光)은 산서성 하현(夏縣) 사람으로 자(字)가 군실(君實)이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역사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으며, 송(宋)나라 영종(英宗) 조서(趙署)가 재위하던 때, 어명을 받들어 ˝자치통감˝을 편찬하였다.
사마광은 이 역사서를 쓰기 위하여 끊이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였으며, 매일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잠이 들어 작업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하여, 사마광은 둥근 몽둥이를 준비하여 스스로 편안한 잠을 자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사마광의 작업 태도는 매우 엄격하여, 많은 원고들은 수많은 수정을 거쳐서 이루었다. 예를 들면, 당대(唐代) 부분은 원래 600여 권이었는데, 원고가 끝났을 때에는 겨우 80권으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대규모적으로 정선(精選)하였다는 것은 이 역사서의 작업량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전체의 책이 완성되었을 때에는 모두 294권에 달했으며, 별도로 30권의 목록이 있다. 여기에는 전국(戰國)시대에서 오대(五代)시대에 이르는 1,360여 년 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완성된 원고는 모두 반듯한 정자(正字)로 씌여져 있으며, 남은 원고들은 낙양(洛陽)에 쌓아두었는데, 그 양은 두 칸의 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송나라 신종(神宗) 조욱(趙頊)은 이 책에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통치의 기준으로 삼았다.
사마광은 일생 동안 ˝자치통감˝이외에도,˝계고록(稽古錄)˝ ˝속수기문(涑水紀文)˝ 등의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시문집(詩文集)으로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을 썼는데, 그의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학문 태도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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