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窮鼠齧猫(궁서설묘)

[고사성어] 窮鼠齧猫(궁서설묘)

[字解]
窮-궁할 궁
鼠-쥐 서
齧-깨물 설
猫-고양이 묘

[意義]
궁지에 몰린 쥐 고양이를 문다.

[出典]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解義]
漢武帝(한무제)는 匈奴(흉노)정벌에 따른 재정위기를 타개하고 또 재벌과 지방 豪族(호족)의 세력을 꺾기 위해 획기적인 경제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소금과 철의 생산, 화폐의 주조 등을 국가 專賣事業(전매사업)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朝廷(조정)의 권력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도 넉넉해 졌고 백성들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利權(이권)을 빼앗긴 재벌이나 지방 豪族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 뒤 기원전 81년, 昭帝(소제)는 輿論(여론)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의 지식인 60여명을 불러 중앙 공무원과 이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중국 최초의 공개 討論會(토론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때의 토론을 대화형식으로 엮은 것이 西漢 桓寬(환관)의 鹽鐵論(염철론)이다.

먼저 공무원을 대표하는 御史大夫(어사대부·현재의 검찰총장) 桑弘羊(상홍양)및 고관들은 다들 현재의 국가 專賣制度(전매제도)를 적극 찬성했지만 지식인들은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토론은 갈수록 격렬해져 국가의 재정문제를 넘어 통치방법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桑弘羊을 비롯한 공무원들은 嚴法(엄법)을 통한 法治主義(법치주의)를, 지식인들은 禮治(예치)를 주장했다.
그러니까 전자가 法家(법가)에 속한다면 후자들은 孔孟(공맹)의 儒家(유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桑弘羊 측이 과거 역사적 사례를 들어 엄한 法이야말로 최고의 통치방법이라고 역설하자 이에 맞서 지식인들은 秦始皇(진시황)의 예를 들었다.
곧 당시 엄하기로 이름난 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백성들은 塗炭(도탄)에 빠져야 했으며 마침내 嚴法을 이기지 못해 도처에서 蹶起(궐기)했던 점을 들었다.
결국 이 때문에 陳勝(진승)과 吳廣(오광)의 반란이 일어나 秦나라는 불과 15년 만에 망했다고 했다.
곧 백성을 엄한 法으로 혹독하게 내몰기만 하면 결국에는 저항에 부딪쳐 社稷(사직)은 망하게 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보다는 仁義(인의)에 의한 통치가 더 낫다는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그것을 고양이와 쥐의 관계에 比喩(비유)했다.
쥐는 고양이만 보면 무서운 나머지 오금을 못 펴지만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되면 고양이를 물 수도 있다는 것이다.
窮鼠齧猫는 이를 뜻하는 말이다.
桓寬의 鹽鐵論 본문에는 ‘窮鼠齧狸’(궁서설리)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狸는 ‘살쾡이’를 뜻한다.


[하루살이의 죽음] 朴 在 植

아침에 산책을 나가면 눈 언저리에 추근스럽게 날아드는 하루살이 떼의 성화에 적이 시달림을 받는다. 이 먼지 같은 날벌레는 조금만 경계에 틈이 생기면 느닷없이 눈 안을 엄습하여 시각 기능에 혼란을 자아 놓는다. 안공을 겨누어 쏜살같이 달겨드는 폼이 흡사 제2차 세계대전 때 적함을 향하여 돌진하는 일본의 ‘가미카제’ 전투기의 서슬을 방불케 한다. 눈 안에 든 이물질을 간신히 닦아내면 티끌 같은 형해가 손수건에 묻어 나온다. 하루를 못다 산 하루살이의 주검인 것이다. 20을 못다 살고 비행기와 함께 자폭하여 죽은 ‘가미카제’ 특공대의 어린 생명들처럼 애처롭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기 위해 3년의 애벌레 시절을 보낸다고 한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전세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일본이 궁서설묘(窮鼠齧猫)의 승부수로 창안한 ‘막가파’적인 전법이다. 철없는 소년 항공병(少年 航空兵)들을 조련시켜 ‘가미카제’호로 명명된 소형 전투기에 태워서 폭탄이 실린 기체와 함께 적함에 부딪쳐 자폭하게 한 기상 천외의 전법인 것이다.

‘가미카제(神風)’는 그 옛날 일본으로 침공하던 몽고군이 해상에서 태풍을 만나 자파하는 이변이 생겼는데, 그 태풍을 ‘신이 일으킨 바람’이라고 믿은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니까 무구한 소년병의 목숨을 제물로 받쳐 인위적으로 ‘신풍(神風)’의 기적을 창출한다는 발상인 셈이다. 아무리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이 상식의 의표를 찌른 비정의 전법에 세계는 아연 실색을 하였고, 일본에서는 원자탄을 능가하는 필승의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전의를 고무하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일본에서도 ‘가미카제’가 ‘막가파’적인 행태의 대명사로 변해 버린 반세기 전의 신화 같은 전쟁의 유물이다.

그런데 그 ‘가미카제’의 망령이 분단 조국의 북쪽 땅에서 현신한다는 기막힌 이야기가 들려온다. 외신이 전하는 소식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가미카제’ 특공대와 꼭 같은 특공 비행대를 만들어 전쟁이 일어나면 미리 점찍어 둔 남한의 군사 요충지에 자폭 공격을 감행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울 일은 그 비행기를 타고 하루살이처럼 죽은 인간 폭탄 180명을 뽑는데 만 몇천 명의 지원 인파가 몰려왔다는 이야기이다. ‘가미카제’ 때도 어린 소년병들이 “천황 폐하(天皇陛下)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며 앞을 다투어 용약 출진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나는데, 그런 비장의 용장들이 앞을 다투어 지원해 온 것일까? 아니면 극심한 식량난을 못 이겨 굶어 죽으나 깨어져서 죽으나 어차피 하루살이 목숨인데, 먹여 주는 밥이나 얻어 먹고 죽자는 궁여지책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6·25 때 적 치하의 서울에서 굶주리다 못한 지방 출신 소수 학생들이 의용군에 자원하여 나가던 비참한 정경이 눈앞에 선연하다.

6·25 때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전황이 다급해진 남쪽에서도 ‘소모 장교(消耗將校)’라는 말이 세간에 나돌았다. 보병 전투에서 소대장으로 맨 앞장에 서야 하는 소위급 장교를 두고 이르는 말인데, 앞장 서서 싸우다 보니 전사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그 소모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군에서는 주로 대학생 중에서 후보생을 모집하여 2개월간의 벼락치기 교육을 시킨 다음 소위로 임명하여 일선에 배치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병 훈련에도 못 미치는 단기간의 교육 내용은 기초적인 지휘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고작이고, 여타의 태반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국가와 부모 형제를 위해 미련 없이 싸우다 죽어라’는 요지의 정신 훈육이 차지했다고 한다. 수료 일주일을 앞두고 외출한 친구가 침통한 표정으로 들려준 르포인데, 그도 출진한 지 일주일만에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는 구슬픈 군가가 거리에 흐르던 암울한 시대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권력 의지가 기지개를 켜면 전쟁을 낳고, 전쟁의 메커니즘은 인간의 생명관을 무가내하 하루살이의 생태로 평가 절하시킨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라고 갈파한 것은 철학자가 아닌 희대의 독재 권력자 스탈린의 말이다.

새삼스럽게 인생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살다가 죽는 일이다. 이 명료한 해답 앞에 저절로 헤식은 웃음이 나온다. 벌레는 충생(蟲生), 짐승은 수생(獸生), 나무는 목성(木星)이다. 그런데 유독 왜 인생이 대수인가? 내가 우연찮게도 사람으로 태어난 때문의 궁리에 불과할 터이다.

하면 ‘사람’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던가? 바람에 나부끼다 시드는 일개 초생(草生)과 같은 것이 별수 없는 인간인데, 다만 ‘내 생각함으로 내가 있다’는 자의식이 연고로 존재의 존엄성을 보장받는 동물일 따름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된 특권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에 있을 뿐이다. 생각하는 능력을 기화로 인간의 의학은 자신의 생리와 흡사한 동물을 잡아 생체 실험을 대신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

갈대와 같은 인간에게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구실을 하는 ‘생각’이란 그러면 무엇인가? ‘생각하는 갈대’의 발견자 파스칼은 “우주는 공간에 의하여 나를 포용하고, 하나의 점인 양 나를 삼킨다. (하지만)나는 사고에 의하여 우주를 포용한다.”고 사고 즉 ‘생각’의 위대성을 천명했다. 물론 이 절세의 명제를 허튼 수작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도 생각의 소산이다.

나의 ‘생각’이 우주를 포용한다는 말은 매우 기발한 발상 같지만 따지고 보면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이치에 불과하다. 인간의 어떠한 잣대로도 헤아릴 수 없는 영원 무한한 우주는 ‘나’라는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만이 실재하는 형이상적인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나’의 죽음과 함께 우주도 소멸한다.

그래서 ‘나’라는 한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나의 죽음은 곧 우주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인류의 속죄를 위해 스스로 죽음의 십자가를 진 예수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런 인간의 생명을 휩쓸어 한갓 소모품의 통계 숫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전쟁을 궁리하는 권력자들의 가증스럽고도 가공할 생각이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하루살이의 주검을 매만지며 부질없이 굴리는 이와 같은 생각도 미구에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생각하는 갈대’의 오만한 특권인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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